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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시니어 스토리] "이민 첫해 학비 대출이 은행과 첫 인연"

한인 타운 올드 타이머
박창규 전 한미은행 이사장

올드타이머 박창규(왼쪽) 전 한미은행 이사장과 부인 킴벌리 박씨가 지난 17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올드타이머 박창규(왼쪽) 전 한미은행 이사장과 부인 킴벌리 박씨가 지난 17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옛말에 '인생에는 (최소) 3번 기회가 있다'는 것이 있다.
 
첫 한인은행인 한미은행의 박창규 전 이사장(2002-2004)에게는 특히 그런 것 같다. 물론 기회를 잡고 안 잡고는 개인적인 문제지만, 그는 모두 잡았다.
 
첫 기회는 미국 이민이다. 1941년생인 그는 서울대 약대를 나오고 이민 오자마자 USC약대를 마친 후에 바로 한인타운에 한인이 주인인 첫 약국(올림피아 약국)을 열었다. 지금은 50곳도 넘을 정도로 한국말이 통하는 약국이 많지만 당시에는 한인 약사가 드물어 말이 잘 안 통해 약도 제대로 못 먹던 상황에 구세주 같은 역할을 했다. 문전성시 덕분에 2호점 웨스턴 약국, 3호점 세라노 약국의 문을 열었다.
 
대략 3번째 기회는 1982년에 왔다.  
 


"어느 날 평소 신뢰가 두터웠던 정원훈씨가 은행을 설립하겠다고 집에 찾아왔어요. 당시엔 한인 자본으로 세운 한인 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창립 이사들에겐 모두 큰 모험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한미은행 창립 이사가 됐다. 총 500만달러를 조지 최, 안이준, 안성주씨와 모았는데 그중 6%쯤을 투자했다. 지금 되돌아 보면 은행에  투자한 것이 쉬워 보이지만 정 초대 행장을 100%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에 더 공격적인 부동산 투자나 더 안정적인 금융 상품에 투자했다면 훨씬 더 큰 돈을 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한인들에게 친근한 한인은행을 원했다. 한인타운에서 돈을 벌었기에 한인들의 비즈니스를  도울 수 있는 은행을 시작한 것이다. 결과는 "한때 한미은행 너댓번째 개인 주주까지 됐다"고 전한다.
 
그에게 은행은 또 다른 인연이 있다. 미국에 온 첫 해, USC약대 진학하고 보니 첫 1년 학비 7000달러를 구할 길이 없었다. 크레딧도 없고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는 코리아에서 온 낯선 학생이 약대 학비를 빌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가 지금도 고맙고 감사하는 일이 그때 일어났다. 은행 대출 담당 직원이 그의 얘기를 듣고 학비를 빌려줬다. 코리아에서 온 낯선 학생에게는 매우 기적같은 일이다. 불과 10여 년 후 창립 이사가 된 것도 미국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다.
 
네번째 기회는 58세 은퇴 후에 왔다. 돈은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돈 보다 더한 것을 얻었다.
 
"어려서 이은관의 배뱅이굿, 강옥주의 회심곡을 좋아했다"며 그는 "평생 판소리를 꿈꿨는데 음악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판소리는 물론, 색소폰과 아코디언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만났다. 취미생활에 그치지 않고 봉사활동으로 이어졌다. 이제는 교회, 양로원까지 공연에 나서고 있다.
 
이 뿐이 아니다. 미주에 국악을 알리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2013년부터는 후원하는 '미주한국국악경연대회' 대회장을 맡았고 올해 10회 대회는 10월28일에 개최한다. 또 고원기념 사업회를 설립해 고원문학상을 제정하는 등 문화 사업에도 힘을 쏟으며 보람을 얻고 있다.
 
박 전 이사장은 "그 옛날 대출 담당 직원을 찾아 보은하고 싶다"며 "그때 학비 대출 덕분에 한인 은행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는 것을 알면 매우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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