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인생 풍경
서산 친구집에 가기 위해 일찍 준비를 한다. 어제 잠자리에 들면서 막연히 가야될 거라 생각이 들었다. 출판 기념회에 먼 길을 달려온 친구는 그 날 밤 다시 먼 길을 재촉해 갔다. 오늘 나도 재촉해 그를 만나러 간다. 친구의 도움으로 티켓을 핸드폰에 다운로드 받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기 위해 인사동 안국역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른 아침 공기가 차다. 열차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오고, 곧이어 한 무리의 사람들 틈에 끼어 열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다음 역은 종로3가입니다.” 짧은 멘트를 남겨놓고 열차는 달린다. 멈춘 역마다 사람을 밀어내고 사람을 반겨주고 열차는 바쁘다. 나도 틈에 끼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다.고속버스 터미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터미널은 한산하다. 랩탑을 켜놓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 한 몸이 되어 아쉬운 이별을 놓지 못하는 사람, 한칸 떨어진 나에게도 들리게 큰소리로 전화를 하는 사람, 엄마를 떠나 보내면서 손을 꼭 잡고 놓지 못하는 자식의 안타까움이 배어나는 이곳은 바로 인생풍경이 아닌가. 어딘가로부터 와서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시간과 풍경 속에 추억을 묻고, 문이 열리고 문이 닫치고 또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울고, 이별을 고하는 바로 그 인생이 아닌가.
친구와의 짧고도 긴 해후를 뒤로 하고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밤거리를 고속으로 달린 버스는 나를 낮선 곳에 내려놓았다. 지하철 계단을 여러 번 내려가고, 오르는 동안 3호선이란 부호와 화살표는 잃어버리면 안 되는 유일한 지표였다. 누군가가 건네준 비밀 번호처럼 손에 꼭 쥐어야 했다. 잠깐 눈을 돌리면 나는 목적지로부터 멀어져 갈 것이기에 피곤한 눈을 부릅떠야 했다. 밤 12시가 되어야 도착한 곳. 인생의 종착지 같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이, 활 시위를 떠난 화살이 바람같이 날아가듯이 오늘 하루가 꼭 태어나 지내온 그런 인생과 꼭 닮았단 생각이 든다. 시카고가 궁금해진다. (시인, 화가)
인생 풍경
글속에 숨고 그림 속에 번질게요
익어가는 시간들이 쓸쓸해져요
마주 하는 모든 시간
다가오는 모든 풍경들이 아픔인걸요
놓칠 수 없는 시간의 간극 속에 머무를 뿐
닫을 수 없는 밤은 늘 찾아오는 걸요
달이 지고 나면 아침은 늘 숨어있어요
거기 계세요 손짓하는 나를 보셨나요
늘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있어요
잎이 흔들리고, 자동차 경음이 울리고,
신호등 파란빛에 그리로 가고 있어요
커피 향을 맡으면
잡은 손을 놓친 것 보다 더 기대고 싶어
돌아선 뒷모습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려요
잘 가세요
환한 대낮에 등지고 걷고 있어요
바람에 밤나무 꽃이 아래로 떨고 있어요
강물을 바라다 보는 일이 서로 편해진 오후
흐르는 물속에 그대 웃음 소리가 들려요
내가 힘들어도 그대가 기쁘다면
나는 강물이 되어 멀어져도 슬퍼할 리 없어요
낯선 방에 누워있어요
집을 받들고 길게 옷 벗은 나무들
천근의 눈꺼풀을 껌뻑이며
지탱하려고 수십 번을 뒤척였어요
한번은 어린아이 마냥 천진한 마음으로
또 한번은 천천히 누르는 아픈 통증으로요
잘 가세요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강물은 까마득히 멀어져
낮선 이의 가슴으로 흐르고 있어요
운전을 하면서 전화를 하고, 또 전화를 하고
“응 응 그치”를 연이어 말하고
귀를 막고 싶은 옆자리가 추워요
바다로 흐르는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무너뜨려야 할 짐을 건네주는
미드나이트는 너무 검어요
두리번거려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요
새벽을 기대할 수 없지만
이만 안녕요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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