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어머니
매년 5월 두번째 일요일은 어머니날이다. 이런 날은 유독 어머니가 더 보고 싶어진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 어언 20년이 된다. 세월이 흐를수록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왜 해를 거듭할수록 더 선명하게 어머니 생각이 날까?어머니는 17세에 6살 많은 5대 종갓집 장손인 아버지한테 시집 왔다. 아버지는 일곱 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남동생과 함께 삼촌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부잣집 장손이었으나 나이 어린 탓에 두 삼촌에게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머슴처럼 살다가 어머니를 맞이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성인이 된 후에 두 삼촌이 자신의 재산을 모두 빼앗은 것을 알고 홧술을 매일같이 마셔 4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셨다. 어머니는 36세에 8남매를 거느리고 청춘과부가 된 것이다.
재산이라 곤 논 한 마지기와 밭 두 마지기, 방 두 칸 짜리 초가집이 전부였다. 맏이 누나는 동생들에게 밥숟가락이라도 덜어주고자 일찍 출가하였고 두 형은 머슴살이하였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항아리 장사를 하였는데 이른 봄에 타향으로 장사를 나가면 초겨울에나 집에 오셨다.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시기 때문에 둘째 누나는 네 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하여 초등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소녀 가장이 되어 엄마 노릇을 했다. 내가 아홉 살 때는 어머니가 큰 외삼촌과 동업으로 항아리를 장사를 나갔는데 외삼촌이 주색잡기에 빠져 빈손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우리는 3일 동안 물만 마시고 굶은 적이 있었다. 이때 어머니는 화병을 얻어 이마에 수건을 동여매고 며칠을 앓아누우셨다. 그 추운 겨울날 땔감조차 없어 차라리 양지바른 논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낫겠다 싶어 나갔는데 논둑에 어른 손바닥만 한 시루떡이 말라 비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곤 주워서 집에 왔다. 어느 집에선가 올해 농사 잘되게 해주십사 고사 지낸 떡이었다. 누나가 솥에 넣고 쪄서 같이 조금씩 나누어 먹은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그 후 동네 매파 할멈이 어머니에게 부잣집 영감에게 재가하여 팔자 고치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다는 굳은 각오로 자식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기에 농사짓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다.
어머니는 공항동 시장 바닥에 좌판을 깔고 생선 장사를 하였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어머니한테 달려가 도와드렸다. 동창 여학생들이 어머니 손 잡고 시장에 오는 날이면 나는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창피해서 숨기에 바빴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엄하게 키우셨는데 자식들에게 ‘애비 없는 호래자식’ 이라고 손가락질당하지 않게 처신하라고 늘 당부하셨다. 형제들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배우지는 못했지만 범법자로 죄짓고 교도소에 들락거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우리 형제 중 어머니는 유독 나에게 애착이 많으셨다. 아버지를 빼다 박은 붕어빵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는데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때는 어머니가 우리 교실에 두 번이나 찾아오셔서 수업 참관을 한 적도 있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복에 금빛 단추를 다시며 어머니가 콧노래를 부르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형제들에게 미안하게도 고생을 하지 않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는데 대학원 졸업식장에서 어머니는 마치 당신 자신이 졸업이라도 하는 양, 사부인 앞에서 헛기침을 자주 하셨다. 내가 미국에 이민 오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둘째 아들 집에서 기거했는데 작별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애비야! 이 어미가 죽거들랑 묻고 가거라” 신신당부 하셨는데 어머니가 기력이 없어 누워 잠드신 틈을 타 어머니 이마에 입을 맞추고 도망친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돌이켜 보면 후회막심한 일이다. 어머니의 부탁을 뿌리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머니는 82세까지 사시고 내가 이민 온지 4개월 후인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나셨다. 나를 제외한 우리 7남매가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내 이름을 부르며 허공에 손을 한번 휘젓고 운명 하셨단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못난 자식 놈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형제들은 내가 걱정한다고 알리지 않고 장례가 끝난 후에나 기별해 왔다. 나는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하숙방에서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는데 주인집 할머니는 내가 기도하면서 우는 신앙심이 깊은 참된 신자로 오인하기까지 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쏟는 희생과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 아니겠는가? 불가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따르면 어머니는 우리를 낳을 때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낳아서는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준다고 한다.
그 어떤 어머니도 자식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어머니 살아생전에 효도를 못 해 드린 것이 천추의 한이 되어 응어리진 채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이진용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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