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교회 미래 밝지 않지만…연합해서 힘 모아야"
<고 박희민 목사가 남긴 이야기 2ㆍ끝>
나성영락교회로 오게 된 계기
당시 한인 교계 분위기 밝아
"나는 받은 게 많은 목회자"
젊은 목회자 보면 마음 아파
목회자들 열정 갖고 임해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날 것
어느 순간부터 목회지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토한인장로교회도 변화가 필요했다. 그때부터 목회를 두고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토론토한인장로교회 20주년(1987년)을 한 해 앞두고 당회에 조심스럽게 리더십 교체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당회도 덤덤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서로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했다.
서로의 생각을 확인한 뒤 기도의 시간을 갖고 있는 가운데 교회는 20주년을 맞았다. 때마침 그때 나성영락교회에서 청빙 제의를 받았다. 청빙을 받기 1년 전부터 당회에 사임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그해 9월 사표를 냈다.
물론 자세한 이야기를 모르는 일부 교인들은 '큰 교회로 가려고 사표를 냈다'는 오해도 했다. 그런 게 절대 아니었지만 항변하지 않았다.
처음 나성영락교회에 청빙을 받아 간 것은 1988년 1월이었다. 당시 김계용 목사 후임으로 청빙을 받았고 1989년 10월부터 제2대 담임목사로 위임받았다.
김계용 목사님과의 인연은 깊다.
청년 시절 서울장로회신학대학 재학중에 대구에서 군대(당시 2군 사령부ㆍ1957~1960) 생활을 했었다. 군시절 잠시 외출했다가 대구중앙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는데 그때 김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담임 목회를 하고 계셨다. 당시 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분의 설교, 성품 등 모든 것을 본받고 싶었다.
이후 김계용 목사님은 대구에서 서울 무학교회로 목회지를 옮기셨다. 그 사이 나는 제대를 한 뒤 남은 학업을 다 마쳤다.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장 먼저 무학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김 목사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며 '무학교회에 교육 전도사 자리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분 밑에서 사역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자리가 없다'며 거절하셨다. 훗날 나성영락교회에서 청빙을 받은 뒤 김 목사님을 만나 예전 일을 물어봤다. 그때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셨다.
돌이켜보면 인연이란 건 참 신기하다. 그때 무학교회에서 사역은 못했지만 김 목사님은 27년 후에 나를 후임 목회자로 결정하셨다. 그렇게 인생의 방향이 또 한번 바뀌게 됐다.
처음 LA에 갔을 때 김계용 목사님은 은퇴를 앞두고 안식년을 보내고 계셨다. 청빙을 받고 일단 행정목사로 사역했지만 주일 설교도 하고 대리당회장 역할도 맡았다. 이후 김 목사님이 돌아오셔서 8개월 정도 공동 목회를 했다.
젊은 시절 김 목사님과 꼭 같이 사역을 해보고 싶었는데 뒤늦게나마 LA에서 그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짧지만 김 목사님과 공동목회를 했던 그 시간은 참으로 유익했다.
당시 나성영락교회는 리더십 이행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사역 철학을 꾸준히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김 목사님과 함께 수개월간 사역하며 그분의 목회를 이해할 수 있었고 부작용없이 사역을 인수인계 하는 시간이 됐다.
당시 나성영락교회는 동양선교교회와 함께 LA의 양대 교회였다. 그때 한인 사회에는 이민 교계를 대표했던 목회자 4명이 있었다. 나성영락교회 김계용 목사님을 비롯한 임동선 목사(동양선교교회), 조천일 목사(라성빌라델비아교회), 김의환 목사(나성한인교회) 등이다.
그때 한인 교계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오렌지카운티 지역에서는 김광신 목사의 은혜한인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이민 교회가 서서히 활기를 띠는 시기였다.
그 가운데 젊은 목회자가 청빙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기대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 3년간 교회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주보 양식까지 그대로 두었다.
이유가 따로 있었다. 담임목사로 부임했다고 오자마자 기존의 것을 바꾸기 시작하면 전임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일이다. 전임자를 따르던 교인들에게도 섭섭한 감정이 생길 수 있다. 교회가 잘 해오던 것을 굳이 바꿀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이어가는 노력이 더 중요할때도 있다.
교회 사역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건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 3년 정도 지났을 때다.
전통 형식의 예배 대신 현대적인 느낌의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예배를 도입했다. 과감하게 목회자 가운도 벗었다. 설교를 하는 강단도 좀 더 자연스럽게 바꿨다.
외형을 바꾼다고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다. 그 당시 이민 목회를 경험하면서 느낀 부분 중 하나는 교회에서는 열심인데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비신자처럼 살아가는 신앙인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민 생활 자체는 절대 녹록하지 않았다. 삶이 고단하다 보니 마음의 상처를 가진 이민자도 많았다.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거나 가정이 깨져 아픔을 안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가정을 바로 세우고 치유하는 사역도 필요했다.
1세대 이민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으면서 2세들도 미국에서 태어나기 시작했다. 차세대 기독교 교육의 필요성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한인교회가 더 이상 울타리 안에만 있어서는 안 됐다. 지역사회, 타인종과도 교류해야 하는 중요성도 절감한 게 그때다.
교회 규모가 크니까 토론토에서 사역할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300명 정도까지는 목회자와 교인이 어느 정도 관계성을 가질 수 있었는데 큰 교회로 오니까 그 부분이 참 아쉬웠다.
사역은 관계가 중요하다. 당회원 가정을 개인적으로 만나 좋은 식당에서 대접을 했다. 그들의 삶을 듣고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자 했다. 나중에는 3가정씩 함께했다. 당회원들도 부부끼리 친해지고 관계성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목회 비전을 세웠다. 총 7가지였는데 ▶복음적 설교와 사역을 통한 전인적 구원 ▶이민자의 아픔과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 ▶평신도 리더를 키워 그들과 함께하는 교회 ▶2세 교육과 차세대를 세워주는 목회 ▶세계선교 리더십을 발휘하는 목회 ▶지역사회를 섬기는 목회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만들기 등에 주력했다.
목회를 하면서 무엇보다 차세대 사역에 중점을 뒀다. 이중언어가 가능한 교역자를 모집했다. 주일학교 교사들도 이중언어를 사용하게 했다. 그때 2세들을 위해 영어권 목회도 시작했다. 이중언어 사역을 시작했더니 어느덧 주일학교 학생들만 1500명 이상 모였다.
1000만 달러 장학기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1세대에서 끝나는 한인사회가 아니라 미래를 살아갈 차세대 한인들을 위해 씨앗을 심는 게 필요했다. 장학기금을 모았더니 매해 30만 달러가 나왔다. 그 장학금으로 목회하는 동안 3000명 이상 학생을 도왔다. 박사 학위 과정에 있는 학생만 100여 명 이상이었다. 지금은 그 학생들이 곳곳에서 대학 교수, 목회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나성영락교회는 그때 모인 기금으로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사람을 키운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부교역자의 성장도 필요했다. 함께 동역 하면서 그들을 최대한 많이 격려했다. 그때 부목사로 있었던 진재혁 목사, 박형은 목사, 양춘길 목사 등 많은 교역자가 이후 교계 곳곳에서 자기 몫을 다하는 목회자가 됐다. 그야말로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성영락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27가정에 매월 2000달러씩 지원하며 선교사를 파송했다. 선교지 현지 목회자 160명도 도왔다.
IMF때 한인 선교계도 너무나 힘들었다. 그때 KAMSA라는 기관을 조직해서 500명의 선교사에게 매월 200달러씩 보내는 운동을 펼쳤다.
그렇게 나성영락교회에서 16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70세가 정년이었지만 나는 68세에 은퇴를 결심했다. 전임인 김계용 목사님도 정년을 채우지 않았었다.
나는 참으로 받은 게 많은 목회자다. 목회를 하며 이렇다 할 위기도 사실 없었다.
요즘 젊은 목회자들을 보면 사실 마음이 아프다. 목회 환경이나 상황이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지고 있다. 신학을 하겠다는 젊은이도 줄고 있다. 주변을 보면 택시 기사를 하는 목사들도 있다. 특히 중고등부 같이 차세대를 담당하는 사역자들이 그렇게 힘들다고 하소연을 한다. 한인 교회도 팬데믹을 거치며 많이 사라졌다.
인간적으로 이민교회 미래를 생각하면 사실 밝지 않다. 그럴수록 소형 교회들은 오히려 연합 운동 등을 통해 힘을 모아야 한다. 이중언어가 가능하고 합리적인 젊은 목회자들이 헌신하는 마음으로 열정을 갖고 임하면 그래도 한인 교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정리=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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