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어머니의 장맛
냉동고를 정리하다 작년 봄에 삶아 넣어둔 쑥 덩어리 하나를 꺼내 쑥국을 끓이려 하니 집에 된장이 떨어졌다. 한국 마켓에 가서 즐비하게 뽐내고 있는 장들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성분표를 보려 했더니 글씨도 작고 그 위에 영어로 써진 종이가 덥석 붙여져 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지난번에 샀던 된장을 집어 들었다.집에서 간장·된장을 담은 지가 까마득하다. 큰딸이 고2 때까지 친정어머니는 음력설이 지나면 메주를 서너 덩이 부쳐주셨다. 넓은 양푼에 적당량의 물에 천일염을 풀어 계란이 동전 하나만큼 보이게 떠오르도록 간을 맞춘다. 불순물이 가라앉도록 한나절 동안 뚜껑을 덮어둔다. 항아리에 체를 받혀 놓고 소금물을 항아리에 부은다음 씻어 말린 메주를 담근다. 붉은 고추 몇 개와 참숯 몇 개를 위에 얹는다. 날마다 아침이면 항아리 뚜껑을 열어놓고 햇볕을 쬐고 해가 넘어가면 뚜껑을 덮는다. 40일이 지나면 메주들이 모두 떠오르고 소금물도 간장 빛을 띄운다. 메주를 건져 간장에 버무려 된장을 담고 간장은 다려 놓는다. 이렇게 일년 먹을 간장 된장을 만들고 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주부가 된 것 같아 스스로 뿌듯함을 느낀다. 부모님이 손수 기른 콩으로 쓴 메주이기에 간장도 된장도 신토불이 그 자체였다.
첫 아이를 대학에 보내려니 공부를 제법 잘했는데도 걱정이 많았다. 언젠가 들은 말이 생각났다. 간장이 제대로 되지 않고 웃물 아랫물이 지면 집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한 말이다. 괜히 간장을 담아서 신경을 쓰느니 아예 담그질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생각하면 어이없다. 그래도 이민 오기 전까지는 어머니 같은 언니가 계셨기에 별 아쉬움 없이 언니가 담은 간장·된장을 얻어 아껴 먹었는데 이민와서 부터는 이것저것 사서 먹고 있지만 살 때마다 힘이 든다.
올해는 유난히도 봄비가 많이 내렸다. 아무리 봄이라도 캘리포니아에 이렇게 비가 많이 온 것은 근래에는 드문 일이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란다. 아무튼 봄비를 충분히 맞고 나무들은 싹을 내기에 바쁘다. 우리 집 감나무도 며칠 전에 싹을 틔우더니 이제는 갓 낳은 아기 손바닥만큼 커져서 봄바람에 흔들리며 좋아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로나로, 이태원 참사로, 튀르키예의 대지진으로 마음과 몸이 다 얼어붙었다. 미국 시인 엘리엇도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듯이 자연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따뜻한 봄을 부른다. 한국의 벚꽃 소식이 마음을 흔든다. 벚꽃뿐인가! 봄나물 소식도 싱그럽기만 하다. 어느새 마음은 어릴 때 고향으로 가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다. 곤히 자고 나면 봄비가 대지를 적시고 있다. 학교 갈 준비보다는 봄비를 맞고 싱싱할 쑥을 생각한다. 방문을 열고 “야, 오늘은 쑥이 참 잘 불겠다” 하고 신나하면 어느새 어머니도 덩달아 함빡 웃으시는데 왠지 그 웃음은 쑥을 썩 잘 캐지 못한 나에게 “뭘, 얼마나 캔다고” 하신 것만 같았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서 우리는 쑥을 캐러 갈 약속을 한다. 부랴부랴 집으로 들어와 내 손에 맞는 낫낫한 칼을 고르고 예쁜 바구니를 챙겨 동네 앞에 모인다. 논두렁 밭두렁이 온통 쑥밭이다. 우리는 쑥을 찾아 이리저리 다닌다. 친구 바구니와 내 바구니의 쑥을 비교하면서 열심히 쑥을 캔다. 나는 쑥이 쫙 깔린 곳은 피하고 풀 사이에서 깨끗이 고고하게 자란 쑥만 골라 캔다.
비를 맞은 뒤의 쑥은 펄펄 살아있다. 저녁때가 다 되어 집으로 온다. 겨우 바구니 반이나 채워온다. 쑥 바구니를 다 채우기가 쉽지 않다. 원래 왼손잡이인데 오른손으로 캐니 더디었다. 어머니는 웃으시며 “참, 깨끗하게도 캤다” 하시며 “우리 영희가 캔 쑥은 다듬을 필요도 없다”고 칭찬을 하셨다. 쌀 뜨물에 된장을 풀어 멸치 몇 마리 넣고 풋내가 나게 쑥을 씻어 쑥국을 끓이셨다. 쑥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다. 우리 집 쑥국은 정말 맛있었다. 어머니는 쑥국을 푸시면서도 내가 쑥을 깨끗이 캔다고 식구들 앞에서 또다시 칭찬하셨다. 신토불이 된장 맛이었을 텐데도 마치 내가 쑥을 깨끗이 캐서 국 맛이 좋은 듯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친구들보다는 양이 항상 적지만 깨끗이 캤다는 자부심으로 눈만 뜨면 방문을 열고 밤사이에 비가 오지 않았나를 살피곤 했다.
그뿐인가 여름방학이면 도시에 사시는 고모님 댁을 가끔 갔다. 오빠가 고모 집에서 하숙을 했기에 내가 가슴에 돈보자기를 차고 곧장 갔다 주었다. 고모가 일찍 홀로 되시어 고모는 4남매를 키우기 위해 도시 변두리에서 시금치·토마토·양파 등 채소 농사를 지으시고 여름에는 포도를 재배하셨다. 그러면서 젖소도 몇 마리 키우시며 무척 바쁘셨다. 사촌들도 학교에 다니면서 아침저녁 밥을 짓고 젖도 짜고 그야말로 작은 농장집이었다. 사촌 언니가 만든 반찬들이 다 맛이 있었다. 가게에서 사 온 진간장을 사용하여 만든 반찬들이 내 입에는 꿀맛이었다. 특히 검은 콩으로 만든 콩장은 어찌나 맛이 있었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 집 콩장은 누런 콩에 조선간장을 넣으니 색도 희무끄레하고 짜고 맛이 없었다. 우리 집은 모두 우리가 농사지은 것만 사용하지 특별히 사서 하는 것이 없었다. 진간장도 사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내가 고모 집 반찬은 다 맛있다고 하면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그때는 그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우리 집은 농사를 많이 지으니 날마다 일꾼들도 많았다. 그들은 품삯을 된장으로 주라고도 하였다. 우리 집 된장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다고 했다. 그 말에 어머니는 너무 기분 좋아하시고 품삯도 주고 덤으로 된장도 퍼주시는 것을 자주 보았다.
된장이나 간장 고추장을 살 때마다 나는 많이 망설여진다. 여러 나라에서 나는 것들로 만든 것을 사 먹어도 되는지 자신이 안 선다. 아무리 유명한 상표라도 옛날 어머니가 손수 담그신 장은 이제 어디를 가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나이가 돼서야 그때 어머니가 만드신 간장 된장 고추장이 진짜임을 깨닫는다. 그럴듯하게 광고를 해도 막상 성분표를 보면 우리 것은 1%단위다. 글로벌 시대에 살며 또 이민 와서 살면서 우리 것을 고집하는 것은 무리인 줄 안다. 그렇지만 겨울이 지나고 간장·된장 담글 때가 되면 그 옛날 고향 집의 장독대가 사뭇 그리워진다.
이영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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