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칼럼] LA시의회 10지구의 역사
초창기 LA시의회는 캘리포니아 주법에 따라 구성됐는데 평의회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당시엔 인구가 1610명 뿐이라 제비뽑기로 2년 임기의 대표 7명을 선출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들은 시민들이 요구하는 각종 민원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지역 학교 운영까지 관리해야 했다. 맡은 일이 많아서였는지 당시 2년 임기를 채운 평의원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6개월 또는 1년만에 시의회를 떠났다.
1889년 인구가 5만 명을 넘어서고 시 헌장을 제정하면서 선거구획을 그려 선거구 대표를 선출하는 제도가 도입됐다. 그해 2월 21일 실시된 첫 선거에는 9명의 시의원이 선출됐다. 그러다 1925년 15개 선거구로 커지면서 지금의 시의회 모습을 갖추게 됐다.
초창기 10지구를 관할한 시의원은 백인 정치인들이었다. 선거구 사이즈는 지금의 한인타운 경계선과 비슷했다. 북쪽은 피코 불러바드와 11기, 남쪽은 워싱턴 불러바드와 제퍼슨까지, 동쪽은 알라메다, 서쪽은 버몬트 애비뉴까지였다.
인구가 성장하면서 1955년에는 윌셔 불러바드에서 제퍼슨 불러바드, 라브레아 애비뉴에서 메인 스트리트까지 구획이 늘어났다. 그러다 60년대에 사우스LA지역인 볼드윈 힐스와 웨스트애덤스 지역이 포함되면서 흑인 정치인이 10지구 대표로 선출됐다. 당시 선출된 흑인 정치인은 LA시에 사상 첫 흑인 시장 시대를 연 탐 브래들리였다.
브래들리 전 시장이 10지구 시의원으로 10년간 내리 연임하는 동안 당시 흑인 거주지 중심이던 레이머트파크, 크렌쇼, 페어팩스 지역까지 몽땅 10지구 안에 들어오면서 사실상 흑인 선거구 시대를 열었다.
10지구에 한인타운이 정식으로 포함된 건 1975년부터다. 이때는 올림픽 불러바드~제퍼슨과 애덤스 불러바드~라시에네가 불러바드와 로데오 로드~10번 프리웨이 동쪽 입구까지 10지구로 불렸다.
브래들리 이후 10지구에 흑인 시의원 선출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데이비드 커닝햄(1973~1987년), 네이트 홀든(1987~2002년), 마틴 러들로(2003~2005년), 허브 웨슨(2005~2020년), 마크 리들리-토머스(2020~2021년)까지, 한인 커뮤니티에도 낯설지 않은 정치인 이름이다.
지난해 리들리-토머스 전 시의원이 뇌물죄 등의 혐의로 기소된 후 시의회가 임명한 시의원직 대행 3명(칼리 카토나, 웨슨, 헤더 허트)도 모두 흑인이다. 그야말로 60년간을 흑인 정치인이 10지구를 대표해 왔다.
그런 10지구의 얼굴이 달라지고 있다. 연방센서스 통계에 따르면 10지구에 거주하는 인종 비율은 라틴계 46%, 흑인 20%, 아시아계 18%, 백인 12%로 도시에서 가장 인종적, 민족적으로 다양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투표할 자격이 있는 유권자도 흑인 33%, 라틴계 32%, 백인 16%, 아시아계 18%로 고르게 분포돼 있다.
최근 LA시의회가 유죄 판결을 받아 시의원직을 박탈당한 리들리-토머스의 후임을 보궐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대신 현재 대행을 맡고 있는 헤더 허트를 재임명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유권자들의 반발이 일고 있다. 앞서 인종차별 발언 스캔들로 사임한 누리 마르티네즈 전 시의원 지역구인 6지구와 뇌물죄로 유죄를 받은 미치 잉글랜드 전 시의원 지역구인 12지구는 보궐선거를 치렀다.
10지구만 유독 재정난을 들어 보궐선거를 시행하지 않으려는 시의회의 의도가 궁금하다. 오늘 시의회에서 허트 대행의 재임명 여부를 결정하는 표결이 진행된다. 2년 전 치열한 싸움으로 선거구 단일화를 이뤄 10지구에 들어간 한인 커뮤니티가 지금이라도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 새로운 얼굴의 정치인이 탄생할 기회다.
장연화 / 사회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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