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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감성의 미학, B급 영화를 장르로 만들다

개봉 20주년 ‘킬 빌’

우마 서먼은 ‘킬 빌’에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악당들을 찾아 복수극을 펼치는 블랙맘바 역으로 골든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Miramax Films]

우마 서먼은 ‘킬 빌’에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악당들을 찾아 복수극을 펼치는 블랙맘바 역으로 골든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Miramax Films]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인글로리어스바스터즈’, ‘장고’, ‘원스어폰 어타임 인 할리우드’까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들 중 어느 것 하나 가벼이 여길 영화는 없다. 그러나 2003년 타란티노가 ‘잭키 브라운’ 이후 6년 만에내어놓은 ‘킬 빌’은 그의 다른 영화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몇 가지의 특색을 지닌다. 격렬한 논쟁이 필요하겠지만, ‘킬 빌(Kill Bill)’을 그의 베스트로 꼽는 의견들 또한 많다.    
 
2편까지 합치면 무려 4시간이 넘는 이야기, 그러나 자신을 죽이려 했던 5명을 찾아내서 복수를 한다는 단순한 플롯,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타란티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유는 일단 악당 빌을 묘사하는 독특한 연출 방식 때문일 것이다. 수수께끼의 인물 빌은 냉정함을 잃지 않는 숙련된 킬러이지만 그의 내면에는 때로는 인간미마저 느껴지는 묘한 신비감이 있다. 타란티노는 70년대 드라마 ‘쿵후’의 데이비드 캐러딘을 캐스팅해 악당의 자질을 한 차원 높여 놨다.  
 
‘킬 빌’ Vol. 2는 Vol. 1에 비해 다른 느낌으로 연출됐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입담이 강조된 대사와 우마 서먼의 모성애 연기에 중점을 둔 느낌. [Miramax Films]

‘킬 빌’ Vol. 2는 Vol. 1에 비해 다른 느낌으로 연출됐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입담이 강조된 대사와 우마 서먼의 모성애 연기에 중점을 둔 느낌. [Miramax Films]

분별되지 않는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킬 빌’의 세계관은 복수의 언저리에서 형성된다. ‘킬 빌’의 복수의 방정식은 K드라마 ‘더 글로리’를 연상시킨다. ‘킬 빌’은 블랙맘바(우마 서먼)라는 이름의 신부(bride)가 결혼식 날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악명 높은 암살 조직의 보스이며 옛 애인 빌과 그 일당들을 찾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복수를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타란티노 특유의 차별성은 죽음에 대한 비가역적 접근에 있다. 그녀 자신 죽임을 당했으면서 복수의 주체로 부활하는 설정이다. ‘더 글로리’의 문동인이 복수를 다 이룬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다시 유여정과 삶을 꾸려나가는 스토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불랙맘바는 무덤에 묻혔다가 다시 살아난다.  
 
타란티노는 이 당시 도가 사상에도 심취해 있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복수라는 축은 죽음의 세계관과 맞물려 있다. 신부는 끝내 복수를 하고 환호로 흐느낀다. 키도(Kiddo, 블랙맘바의 다른 이름)는 빌을 보내준다. 엄마 사자(Mommy, 블랙맘바의 또 다른 이름)는 새끼 사자를 다시 만난다. 자아를 찾아가는 한 여자의 서사는 다분히 도가 사상과 맞닿아 있다.
 
카펫에 누워 퍼덕거리는 물고기와 퍼덕거리지 않는 물고기는 삶과 죽음에 대한 완벽한 이미지다. 삶과 죽음은 다르다. 그러나 타란티노는 삶과 죽음을 분별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한다. 블랙맘바의 서사가 신화로 승화하는 신성한 의식과도 같다.    
 
‘킬 빌’은 타란티노의 색깔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영화이다. 쿵후와 이소룡 오마주, 사무라이 정신 등 동양의 무술과 만화에서나 볼 법한 과장된 액션들이, 일본에 대한 그의 동경심과 함께 전체를 덮고 있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OST ‘Bang Bang’, 바로 이어지는 두 여성의 격투신과 어린아이가 들어오자 싸움을 멈추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 등 시작부터 끝까지 그 어느 장면 하나 예사롭지 않은 데가 없다. B급 감성으로 채워진 그 당시의 대표적 B급 영화로 이후 B급영화가 하나의 영화 장르로 떠오르는 계기가 된다.    
 
타란티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는 기막힌 음악 선택이다. ‘킬 빌’은 장면을 음악으로 연결하는 그의 천재적 감각이 정점에 오른 영화이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유혈 낭자한 칼부림에도 쾌감이 터지고 살인의 죄책감에도 통쾌함이 동반된다. 음악의 힘, 타란티노의 연출력이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그가 오늘날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상기되는 대목이다.    
 
Vol. 2가 1년 후에 개봉을 하지만 완성도 면에서 Vol. 1을 능가하지 못했다. 사무엘 L. 잭슨이 카메오 출연을 하고 1편의 유혈 낭자 가득한 잔학함이 줄어든 대신 서만의 모성애 연기가 들어선다. 줄거리보다 ‘복수는 절대 아름다울 수 없다’는 주제를 풀어가는 잔혹성과 사무라이 정신이 맞물려 펼쳐지는 격투 장면들에 몰입하다 보면 4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킬 빌’에서 서만이 창조해낸, 이소룡을 연상케 하는 노란색 트레이닝복의 금발 여성 이미지는 이후 세계적 유행을 불러왔다. 이전 작품 ‘펄프 픽션’에서 구축한 타란티노와 서만의 케미는 ‘킬 빌’에서 신화로 진화한다.

김정 영화평론가 ckkim2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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