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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천국에서 온 편지

최인호 작가가 살았을 때 고 김수환 추기경이 그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어딘지 아세요?” 잘 모르겠다고 하니 “머리에서 출발해서 가슴까지 오는 여행이지요.” 최 작가는 그 말뜻을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에세이 모음 책인 ‘천국에서 온 편지’에서 “어머니의 편지가 내 마음의 우체통에 도착하는데 꼬박 3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라고 고백했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했던 작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 중 한 분이 최인호 작가일 것이다. 고등학생 때 그의 소설이 신춘문예에 입상했다. 일간지에 연재된 ‘별들의 고향’의 엄청난 인기로 여기저기서 ‘경아’라 불리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어  ‘상도’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 시나리오 작품들이 계속 흥행에 성공해 큰 명성을 누렸다. 그러다가 2008년, 63세의 나이에  침샘암 진단을 받았다. 다음 해 35년간 연재하던 ‘샘터’ 잡지의 ‘가족’을 비롯해 모든 집필을 중단했다. 그가 세상 떠나기 3년 전인 2010년에 출간된 ‘천국에서 온 편지’에서 그의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속죄와 그리움으로 오열하는 최 작가의 모습을 330여 페이지 내내 볼 수 있었다. 필자도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속죄하는 마음에 크게 공감을 했다.  
 
최 작가의 부친은 변호사였는데 1955년 48세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남편보다 한 살 어렸던 그의 어머니는 47세에 홀로되어 9남매를 키웠다. 딸을 두 번  낳고, 또 쌍둥이 딸을 두 번이나 낳아 딸만 6명이 되었는데 그중 세 딸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남아선호가 심했기에 어머니는 시댁에 죄인처럼 사셔야 했다. 필자의 어머니도 딸만 셋을 낳았을 때 가까운 친척이 아버지에게 첩을 얻어 아들을 낳아 대를 이으라고 말했다고 하니 어머니들이 받은 수모와 심적 압박감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 작가의 어머니는 7번째로 장남인 형을 낳고 필자의 어머니는 4번째 형을 낳게 되어 두 어머니는 비로소 한숨을 돌린 셈이다.
 


최 작가는 8번째로 태어나기 전 그의 어머니는 임신 중독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38선이 생겨나 이북에 있던 그의 가족들은 사업차 남한으로 간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남하하려는 남동생을 따라 그의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무작정 따라나섰다. 배가 너무 불러 지게를 거꾸로 타고 넘어왔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월남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북에서 태어나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랫말을 짓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회상했다. 1945년 10월 출생 시 머리가 아주 커서 어머니가 출산에 무척 고생했다는데 그의 별명이 ‘남북대가리’였고 ‘대갈장군’이었다. 성인이 되면서 머리 크기가 다른 신체와 균형을 잡아갔다.
 
최 작가가 10살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어머니가 혼자 가장 노릇을 하며 6남매를 먹이고 학교 교육을 시켜야 했다. 방 하나에서 모든  식구가 살고 남은 방 2개를 하숙이나 세를 주고 먹고 살아야 했다. 많은 식솔을 부양하러 어머니가 지독한 절약 생활을 할 때 최 작가는 불평하면서 학교 핑계로 어머니를 속이고 돈을 더 타냈다고 속죄한다.  
 
필자의 어머니는 청각 장애가 있던 아버지와 결혼해 8남매를 낳았다. 막내는 태어나자마자 숨져 7남매를 키우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은행 부도를 내서 집에는 세간마다 빨간 딱지가 붙었다.  고등학생인 넷째 누나는 큰누나네로, 중학생인 나는 둘째 누나네로 가서 몇 년을 얹혀살아야 했다. 집안 살림만 하셨던 어머니가 생활 전선에 나서야 했고 시장 노점에서 꽃을 팔아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어렵게 번 돈으로 내 대학 입학금을 마련해 주셨는데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리다.
 
최 작가는 어머니가 다리를 못 쓰고, 당뇨병 합병증으로 눈도 잘 못 보셔서  휠체어에 태워 모시고 민속촌을 구경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고 했다.  손을 보니 쉴 새 없이 일해서 두터운 손의 지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고했기에 자기는 엄청난 죄인이라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아들 된 도리로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나는 정말 어머니 모습을 보는 것이 끔찍하게 싫고 고통스러웠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하기 싫은 숙제를 하듯 비틀어진 다리를 십 분 정도 주무르고 "오마니, 갑니다. 안녕히 계시라우요"하며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최 작가는 그의 어머니가 늘 쥐색 두루마기를 입고 멋과는 상관없는 구식할머니였는데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머리를 빗고 립스틱 바르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미소 짓는 게 낯설게 보여 그냥 찍으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타박했던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어 영안실에서 여주인공처럼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비록 평생을 낡아빠진 남루한 옷처럼 살아온 인생이지만 여성이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려는 어머니의 안간힘을 무시하고 이를 박탈하려고 애썼던 내 태도가 실은 잔인한 고문이며 간접적인 살인행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늘 맛있는 것이나 좋은 옷을 싫어하는 줄 알았지만 그것들이 자식들을 위한 배려였던 것을 어머니 나이가 되고 보니 비로소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최 작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천주교에 입교하시게 된 계기로 온 가족이 천주교를 믿게 된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최 작가는 자기가 쓰던 천주교 묵주를 어머니께 드리고 대신 어머니 묵주를 유품으로 받았다.  최 작가는 외출할 때마다 오른쪽 주머니에 어머니의 묵주를 넣고 만지면서 언제나 어머니 손과 마주 잡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어머니 손은 농부의 손이었고 광부의 손이었고 거인의 손이었다” 라고 고백한다. 이제는 최 작가와 부모님 모두 천국에 계시므로 더는 천국에서 편지를 주고받을 일은 없고 함께 손을 잡고 낙원을 걷고 있을 것이다.

윤덕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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