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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사업가 토머스 에디슨

어릴 적 초등학교에서 배운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1847~1931)은 뛰어난 창의력, 불굴의 의지, 착한 심성을 지닌 천재 과학자의 면모다. 학교 교육이라고는 3개월에 불과했지만 축음기, 영사기, 장거리 전화기, 백열전구, 말하는 인형에 이어 전기자동차까지 무려 1093개를 발명, “천재는 1%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그의 어록이 전혀 허풍스럽지 않음을 나타내 보인 위인이기도 하다.
 
며칠 전 우연히 tvN의 ‘벌거벗은 세계사’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에디슨에 대한 이런 인식에 적잖은 착오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설마 하며 여러 자료를 확인해보니 TV 내용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어떤 자료는 에디슨의 발명품 가운데 상당수가 순수한 창작품이 아니라 있던 것을 개선, 개량시키거나 편리함과 상용화를 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있었다. 물론 발명에 생애를 걸었던 그를 존경하고 감사함이 후대의 도리이지 성자 같은 인성까지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알고 평가함 또한 옳지 않을까?
 
“산업과 상업에서 누구나 남의 것을 훔치기 마련이다. 나 자신도 많은 것을 훔치면서 살았다. 하지만 난 어떻게 훔치면 좋은지 그 방법을 알고 있지만 남들은 그 방법을 모른다.” 발명왕 에디슨이 남긴 많은 어록 중 하나다. 1879년 32살의 나이에 그가 발명한 백열등 600여개로 깜깜했던 뉴욕 시내를 대낮처럼 밝힌 성공 이벤트 후 감격 가운데 나온 황당한 자기 고백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디슨의 백열전구는 그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1835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린지가 먼저 만들었으나 돈이 없어 특허 등록을 하지 못하자 1875년 영국의 화학자 윌슨 스완이 특허를 신청해 소유권자가 되었다. 그런 뒤 에디슨이 이 기술을 슬쩍하여 상품화한 뒤 스완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고소까지 했다. 물론 전체를 베끼지는 않았다. 진공처리라는 추가 아이디어로 백열등을 상용화시킨 사람은 에디슨이다.
 


그러나 ‘어떻게 훔치면 좋은지를 알고’ 원천기술을 무시하고 자기 것이라 한다면 자신의 그 많은 발명품도 색이 바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미국민이 생각하는 발명왕 에디슨의 위상은 한국이나 일본에 훨씬 못 미친다. 좋은 예가 뉴저지 에디슨, 멘로팍에 위치한 ‘그를 기림하는전구탑’은 거의 찾는 사람이 없어 잡초만 무성한 채 방치되고 있다.
 
에디슨을 말할 때 포함해야 할 세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당대의 투자가이자 야망의 금융가인 JP 모건이고 다른 두 사람은 같은 전기사업을 두고 이전투구를 벌였던 웨스팅하우스와 니콜라 테슬라다.
 
22살의 나이에 뉴욕에 입성, 주식시세를 실시간 전송케 하는 ‘스톡 티커’를 발명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에디슨이 월가의 상징 같았던 모건을 만나 동업함은 놀랄 일이 아니다. 문제는 교류(A/C)전기의 아버지로 불리는 웨스팅하우스와 니콜라 테슬라다. 에디슨 입장에서 두 사람은 승승장구했던 자신의 직류(D/C)사업에 걸림돌 격이었다. JP 모건과 손잡고 100여개의 직류(D/C)발전소를 맨해튼에 건설한 뒤 천하 통일의 꿈을 펼치려던 그에게 교류(A/C)의 아버지들은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D/C, A/C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업의 성패만 중요했다. 착한 심성의 에디슨이 돈 앞에 어떻게 돌변했는지 다음 회에다루고자 한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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