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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금석 대위 미그기 귀순 사건

3년 간의 6·25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 된 지 채 2개월이 못 되는 1953년 9월 21일 아침, 소련제 MIG-15 제트기 귀순이 있었다.  MIG-15 제트기를 몰고 김포공항에 착륙한 주인공은 당시 21세의 노금석 전 북한 공군 대위다. 바로 그가 지난달 26일 플로리다주 데이토나비치 자택에서 향년 90세로 별세했다.  
 
1932년 함경남도 신흥에서 출생한 노 대위는 1949년 북한 해군 군관학교에 입학해 이듬해 만주에서 비행 훈련을 받은 뒤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19세였던 그는 최연소 전투기 조종사로 소련제 MIG-15 전투기로 100회 이상 출격했다고 워싱턴포스트의 블레인 하든 전 기자가 출간한 책 ‘위대한 수령과 전투기 조종사’에서 회고했다
 
당시 미국은 공산 측 최신 전투기인 MIG-15기를  피해서  야간에 폭격해야 했다. 당시 매우 우수한 전투기였던 MIG-15의 기체 정보를 알기 위해 미극동사령부는 이 기체를 몰고 귀순하는 최초의 조종사에게 포상금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나중에 밝혀진 얘기지만 노금석은 그 엄청난 금액의 포상금이 있는 줄 모르고 귀순했다고 한다.
 
그는 훈련을 핑계로 평양순안비행장을 이륙한 뒤 김포공항으로 기수를 돌렸고 17분만인 오전 9시 24분 착륙했다. 이때의 극적인 광경을 전한 보도에 의하면, 김포공항에 착륙한 노 대위는 은색의 제트기에서 내린 즉시 북한 공군의 계급장을 떼었으며, 기타 신분증을 땅에 던져버리고 미군 비행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고 한다. 이후 노 대위는 미국으로 건너가 닉슨 부통령을 면담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친필로 직접 서명한 미국 시민권을 받아 미국으로 이주했다. 어머니가 이미 월남한 상태여서 극적인 모자 상봉도 쉽게 이뤄졌다.
 


신변 보호 및 안전상 이유로 노 대위는 1954년 5월 미국에서 케네스 로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  그리고 델라웨어주립대학 항공공학과를 졸업한 뒤 듀폰 웨스팅하우스 등에서 항공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리고 2000년 퇴직 전까지 데이토나비치에 있는 대학에서 17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노 대위를 만난 어머니는 “꿈만 같아서 믿어지지는 않는다”며  “금석이는 외아들로 5년 전 흥남화학학교에 다녔는데, 소위 인민군에서 해양대학에 보내주겠다고 데려간 후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했다.  아무튼 철의 장막을 뚫고 날아온 노금석 대위는 꿈에도 잊지 못하던 어머니와 5년 만에 다시 만나는 극적인 모자 상봉 장면을 보여줬다.
 
이제 고인이 된 노금석 대위는 생전 VOA와 인터뷰에서 “공산주의 독재 정치로 갈수록 후퇴하는 북한과 민주주의 국가로 번창하는 한국을 보면서 곧 통일될 것으로 기대했다”고 평소의 느낌을 말했다. 그의 어머니 고 여사도 기자의 물음에 몇 번이고 이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고 여사는 월남 후 4년간 피난민수용소에서 삯바느질하며 아들과의 상봉을 기다리며 살았다고 한다. 아들과 상봉 당시 고 여사는 거칠고 주름진 손으로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고 얻은 검은 십자가를 어루만지며 신기한듯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또 보고 하늘에 감사했다.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했던 북한 공군 조종사 노금석 대위 귀순 사건은 1953년 9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었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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