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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남편의 깊은 마음

딱 20년 전이다. 갱년기 장애로 우울증에 온갖 불편한 증세에 시달리면서 죽어 버릴까 여러 번 생각도 했던 시기가 내게 덮쳤던 것은. 그 당시 내가 속해있던 교회의 연로하신 장로님 둘째 아드님이 신문에 광고를 냈다. 최면 강의가 있겠다고. 혹여 사단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최면이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장로님의 아들인데 설마 과학이라잖아. 최면은 과학이라며 의사들도 최면을 공부하고 환자 치료에 사용한다 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는다. 호르몬 약도 복용을 시작했다. 6년가량 복용하다 겁이 덜컥 나서 중단했더니 도로아미타불. 다시 화끈거림, 우울증, 남편 꼴 보기 싫은 증상이 심해진다. 약으로 내 인생 망칠 것 같아 식생활과 기도로 버텨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던 때, 신문 광고에 나타난 최면 강의로 방향을 틀고 등록하고 열심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신기하다. 최면으로 유도하고 읊어대는 모든 말들은 마치 하늘에 올려드리는 기도와 똑같다. 나쁜 주문은 손톱만큼도 없다. 내가 나를 최면으로 유도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짝을 지어 서로가 서로를 최면으로 이끈다. 당연히 좋은 소망으로 주문을 채운다. 먼 훗날까지 성공을 빌어준다. 건강도 확실하게 부탁한다. 따지고 보면 교회에서 배운 기도하는 생활의 재현이다. 맨 마지막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대신에 하나, 둘 셋! 숫자로 최면에서 깨어나도록 리드하면 끝난다. 확실하게 사단의 주문은 아닐 거라고 나에게 확신을 주면서 한 달, 두 달, 강의를 이어 등록한다.
 
기도로 해결 못 했던 갱년기 장애 증세가 완전히 사라졌다. 마음이 편해지고 밝아진다. 누군가의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되면 앞에 앉혀 놓고 최면으로 빠뜨린다. 간절한 기도가 시작된다. 역시 내게는 하늘로 올리는 기도라고 확신하면서 과학이라는 최면술사들의 정의를 부담 없이 믿어버렸다. 어느 것 하나 내게 불이익을 주는 일이 전혀 없다. 뻔한 이론에 쉽게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강의를 듣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난 완전 푹 빠졌다. 단순하게 모두 믿어 버린다.  
 


배운 것은 그대로 장롱 속 면허로 저장되고 실천과 실습 없는 세월이 20년이 흘렀다. 느닷없이 당한 보이스 피싱을 생각해 보니 완전 최면에 걸려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내가 내 데빗카드로 내 은행에 가서 현금으로 내 돈을 인출한다. 아니지. 엄격히 얘기하면 남편 돈이다. 부부계좌이긴 해도 남편의 월급이 쌓여진 걸 전화기를 통해 주문을 외우는 사단의 목소리에 꼼짝없이 순종하면서 여섯시간 끌려다녔다.
 
인출해 낸 현금을 어느 곳 어느 주소에 위치한 비트코인 투자하는 작은 기계에다 넣어줬다. 여전히 내 전화기는 주문을 외우는 녀석의 목소리로 바쁘게 일한다. 해 떨어지고 은행 문 닫는 시간이 되니 내일 계속하자는 소리에 집으로 향하면서 밀려오는 피로감에 떠올린 남편의 얼굴. 나 어떡하지? 남편에게 뭐라고 보고하나? 내가 오늘 무슨 짓을 하며 끌려다닌 건가? 고작 전화로 들리는 음성에 따라서.  
 
세상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산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규정짓기에 앞서, 한 마디로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다. 따라서 누구의 삶의 형태를 나의 잣대로 판단할 수가 없다.  다만, 적용할 법이 있고 대충 모두에게 적용할 가이드라인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는 그 따라야 할 법조차도 무시하며 살기도 한다.
 
가끔 우리는 지각 없이 멋대로 사는 이들에게 불이익을 당할 때가 있다. 혼자 살다 혼자 당했다면 자신의 방법대로 처신하며 슬그머니 극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한 사람의 주위엔 함께 불이익을 감당하는 가족이 있을 땐 난처한 상황을 피할 수가 없다. 자식이 당했다면 부모님의 엄한 질책을 피해가긴 힘들다. 부부의 경우엔 역시 상대방의 현명하지 못함이나 당한 손해에 비례해서 비난과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경우도 있다.
 
막상 드라마 같은 상황을 내가 주인공이 되어 연출했으니, 배우자의 힐난과 지혜롭지 못했음의 비난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그러나 정말 피하고 싶었다. 경제적 손실보다는 똑똑지 못하게 당했다는 힐책이 나의 목을 조여왔다. 그러다 생각난 사건. 16년 전, 대학 동기 동창에게 남편이 당했던 재산 손실은 나보다 몇 배 바보 같고 큰 금액이다. 그때 남편이, 실망과 억울함과 체면 상실로 인해 병이라도 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며 그를 전적으로 응원했던 기억이다. 돈? 우정? 배반? 까짓거 모두 잃어도 부부간의 사랑이 있고 이해와 배려를 기본으로 의연하게 극복했던 기록이 있다.
 
역시 이번엔 남편의 부족함 없는 아내 사랑 표현이다. “얼마나 놀랐겠어? 많이 놀랐지?” 뜯긴 돈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그냥 마음 편하게 잊고 살자는 무언의 다독임뿐이다.
 
앞으로도 이런 최면에 걸릴 기회는 많다. 보이스 피싱이네 뭐네 사기당할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 경우를 당했다 해도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화살을 돌리지 않을, 사랑과 배려를 장착하고 대비해야겠다.

박기순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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