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나의 명상 그리고 공(空)
지금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치외법권이다. 순서나 앞뒤, 과거나 미래가 들어갈 틈이 없는 정점이다.또 정오(Noon)나 자정(Midnight)은 지금처럼 오전(AM)이나 오후(PM)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오를 오후 12시로 말하거나 자정을 오전 12시로 말하지 않는다.
그냥 정오, 자정일 뿐이다. 즉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지점이 지금이다. 지금은 순간의 찰나이기도 하지만 또한 영원이다. 영원은 끝없이 지속되는 미래가 아니다. 시간과 끝을 초월한 존재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밖에 없다.
나의 현존의 삶은 지금뿐이다. 내가 괴로움이나 추억에 물들어 있을 때는 과거의 마음에 잡혀 있는 것이고 염려나 걱정을 할 때는 미래의 마음에 잡혀 있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여기로 가져올 때 지금은 사라지는 동시에 괴로움과 걱정거리들로 둘러싸여 현존의 삶을 놓친다. 그럴 때 나의 마음이 시간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시간 안에 포위되어 살게 된다. 지금 여기에서 그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는 줄 모르고 잃는다. 지금 여기 말고 외부 어디든 언제든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하는 명상은 고요와 내면에 들어 온전히 지금 여기에 있기다. 생각을 멈추고 시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과거 혹은 미래의 오가는 기억이나 생각에 마음이 붙잡히면 마음은 도시의 네거리처럼 복잡해지며 지금 여기는 밀려난다. 명상은 생각을 차단하고 번민 괴로움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려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나의 본성, 깊은 내 안의 참나에 들어 머물게 된다.
나의 밖, 에고의 세상, 다른 에고들이 만들어낸 이념이나 관념들은 믿을 게 못 된다. 사람들은 명석한 철학자나 종교에서 배운 경전 교리 등으로 자신의 삶의 목표나 의미로 답을 빌려다 쓴다. 자신이 스스로 내면으로 들어가 ‘나는 누구인가’하고 던진 치열한 의문으로부터 얻어낸 답이 아니라 들은 풍월이고 빌려온 것이라면 그들이, 혹은 많은 사람이 변하거나 틀렸다고 하면 뱉어내고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종교적 교리나 이념은 대부분 습관으로 받아들이고 고정불변으로 못박아두었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지 혹은 진리에 대한 의문을 던질 겨를이 없다. 게다가 기존 종교들은 그런 짓(?)을 못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치열하게 얻어낸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기 힘들다.
쾌락이나 즐거움이 있어도 금방 고통이나 괴로움에 시간이 순환하듯이 마음의 자리를 내준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깊은 호흡으로 고요에 들면서 내면으로 내면으로 들어간다. 내면에 모든 문제와 답이 있다. 단 하나의 답, 비움(空)이다. 비움이라는 마스터키 하나로 모든 문을 열 수 있다. 방이든 그릇이든 비어져 공간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쓸모가 생긴다. 비어 있으므로 신성이나 불성의 속성인 고요와 평화가 피어난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방을 치웠을 때 생겨나는 비움 공간은 어디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본래 거기 있었던 것이다.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수많은 기억과 생각들을 들어내면 본래 거기 있던 공간이 드러나는 것이다. 땅에 구덩이를 파도 같은 비움이 그 속 자체에서 피어난다.
예수의 첫 산상 강연(설교)이 ‘성령 안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였다. 마음 비우기를 말한 것이다.
마음을 비운자는 복이 있나니 하고 해석했더라면 간단하고 쉬웠을 것을 안타깝게도 기독교나 천주교에서는 이상하고도 어렵게 성령의 가난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중국 성경의 이 구절 번역이 제대로 됐다고 본다. 허심적인 유복료(虛心的人 有福了) ‘마음이 비어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라고 했다. 허심의 허(虛)가 비운다는 뜻 아닌가. 불교의 주된 사상도 비움-공(空)이다. 불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경전이 반야심경과 금강경이다. 모두 이 비움에 관한 경이다. 예수와 붓다가 공, 비움에서 만나고 결국 마음이라는 같은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나의 명상은 108배로 시작한다. 108배는 15분 정도 걸리는 절 요가인데, 15분 동안 그렇게 팔다리 허리 목 등의 전신운동이 되는 게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108 배를 하고 명상을 하면 몰입이 훨씬 잘 된다.
명상은 깊은 호흡으로 시작한다. 깊고 느리게 들숨과 날숨을 한 호흡으로 하고 수를 열 호흡까지 센다. 그리고 다시 하나부터 열까지를 센다. 그렇게 열번을 하면 백 호흡이 되는데 나는 108 호흡을 한다.
이 호흡의 수를 세다 보면 생각이 끼어들 새가 별로 없다. 생각 잡념이 끼어들었다면 그 들어온 생각을 통찰하며 들여다본다. 이 108 호흡 명상도 보통 15분이 걸린다. 절수련도 108 개, 호흡도 108 개, 이렇게 하면 30분 정도가 되는데, 108 호흡 명상을 한번 추가하면 총 45 분 정도 걸린다.
이쯤 되면 대개 호흡도 사라지고 내 손이 어디 있는지 위치와 감각을 놓치고 나도 너도 없는 고요와 공의 경지, 무상 무아에 들 때가 있다.
사실 이때부터가 진짜 몰입이고 명상이랄 수 있다. 나는 때때로 이렇게 명상을 통해 과거와 미래로부터,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는다, 지금 여기에서.
김윤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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