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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 생애 최고의 해

또 한 해가 간다. 나이 들어서 한 해를 또 보낸다는 것은 젊은이들보다 더 무거운 의미가 있다.  남은 생을 가늠할 수 없는 처지에 순간순간이, 하루하루가, 한달 한달이 그리고 그 모두를 포함한 일 년이 너무 소중하다. 그 일 년을 돌아보면서 나는 행복했던가, 얼마나 행복했던가 곱씹어보면서 새해를 다짐한다.
 
누구에게나 다 그랬지만 지난 3년은 코로나 팬데믹에 억눌려 산 힘든 시기였다. 그 고통과 시련을 여기서 또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 가운데 올해는 나에게 특별히 힘든 해였다. 나는 올해 중반기에 중병을 앓아 사경을 헤매다 살아났다.  팬데믹의 공포도 견딜 수 없었는데 또 다른 중병이라니…. 5월 초 어느 날 새벽에 나는 허리에 심한 통증으로 911에 실려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다. 병원에서의 집중 치료와 이은 요양병원에서 20여일을 보내고 난 후에 회생했다. 그 기간이 약 3개월에 이르렀다.  
 
발병에서 완치까지의 과정에서 우리 가족의 사랑과 헌신적 돌봄을 뼈저리게 느꼈다.  물론 가족끼리 위급할 때 서로 뭉치고 희생적으로 돕기 마련이지만 이런 위기를 맞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특별한 것이었다. 서울에서 기거하던 남편이 급히 날아온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의 병 수발을 하랴, 집안일 챙기랴, 스스로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멀리 북가주에 살고 있던 큰아들도 달려왔다.  LA에 사는 작은아들은 직장 일이 끝나면 매일 같이 병실로 찾아와 나를 보살펴 줬다. 아이들이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수시로 표현할 때마다 나는 용기를 얻었고 삶의 의지를 굳게 다졌다. 힘들고 외로울 때 가족으로부터 받는 사랑과 격려는 가장 소중한 행복의 원천이다.
 
젊은 시절에 본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해’가 떠올랐다. 영화는 세 명의 2차대전 참전군인들, 호머, 알, 프레드가 고향에 돌아오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전쟁터에서 양손을 잃은 호머는 가족들이 자신의 두 갈고리 손을 자꾸 쳐다보고 자신을 동정해 주는 것이 불편하기만 하다.  장래를 약속한 마음씨 고운 약혼녀는 호머를 본 후 애써 모른척하지만 뒤돌아 눈물을 흘린다. 호머는 그런 그녀에게도 부담을 느끼고 멀리한다.  알을 만난 가족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지만 남편과 아버지의 눈치를 보기 바쁘다.  훌쩍 커버린 아들과 딸이 낯설게 느껴지고 아내도 서먹하다. 또한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와 이러한 사회에 적응을 못 하는 자신에 괴로워하며 계속 술만 마신다. 밤마다 전쟁의 악몽을 꾸는 프레드는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전쟁에서 막 돌아온 군인에게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가 않다.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며 사치와 허영에 빠져 사는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실망하고 이혼을 요구한다.  
 


영화를 보며 주인공들이 왜 그런 역경속에서도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라고 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들이 힘든 상황을 안고 있는데도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행복, 즉 통상적이라면 그렇게까지 감격이 크게 느껴지지 않을 행복감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양손을 잃고 갈고리 손인 전상병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여인을 가진 남자는 자신의 온갖 불행에도 불구하고 그때가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이 고향에서 겪는 적응의 어려움과 소외감을 이기게 한 힘은 가족과 이웃과 약혼녀의 사랑과 격려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 해가 생애 최고의 해가 되였다.  
 
나도 내 일생을 돌이켜 보면 최고의 해라 말할 수 있는 해가 있었을 것이다. 명문 학교에 입학했을 때였을 수도 있고 좋은 직장에 입사했을 때일 수도 있다.  또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았을 때 일 수도 있다. 그때는 내 일생이 평탄했을 때들이다. 내 생애 최고의 해는 내가 가장 힘들었던 올해라고 말하고 싶다. 마치 왕비가 된 듯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은 2022년이.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해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출발할 때 인원 절반이 죽은 후에도 첫 수확에 감사한 것은 그런 어려움을 이겨냈기 때문이었다. 촛불이 밝은 대낮이 아니라 캄캄한 밤에 더 밝은 것은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격려도 마찬가지로 역경에서 더욱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나는 올해 추수감사절을 모처럼 3년 만에 남편의 4촌 가족과 함께 보냈다.  그 가족은 얼마 전 사위를 잃고 슬픔 속에 보냈다. 우리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감사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모든 역경을 이겨낸 “올해가 내 생애 최고의 해였다”고 다짐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지난 일 년을 뒤돌아보니 모든 게 감사제목이었다. 아픈 것까지도…  
 
톨스토이는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 하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우선 지금, 오늘을 귀하게 여기고,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을 중요한 사람으로 대하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기라 생각한다. 사랑과 용기 또는 힘이 있는 삶은 행복한 삶이고 그렇게 사는 내년은 또 하나의 내 생애 최고의 해가 될 것이다. 그런 내년을 기대하면서 타고르의 기도를 인용한다. “…..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고통 속에 처하여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배광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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