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엄마의 오래된 인연
친정아버지가 소천하셔서 한국을 방문했다가 오래된 흑백사진을 찾았다. 엄마는 삼선교 한옥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고 의대생 두 명에게 문간방을 세 놓았다고 한다. 지금의 내 딸보다 훨씬 어린 앳된 새댁인 엄마가 두루마기를 곱게 차려입고 졸업식에 참석한 사진이다. 군의관을 마친 두 분은 미국으로 유학하러 가고 항공 우편으로 얼마 동안 소식을 전하다가 우리 가족이 삼선교를 떠나며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쾌활, 씩씩하던 엄마는 아버지 없는 집에서 유튜브나 보며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스마트폰 사용법을 여러 차례 가르쳐드려도 소용이 없더니 ‘임영웅’ 팬이 되며 전화기 사용이 능숙해졌다. 쪼그라든 이 노인이 빛바랜 사진 속 어 여쁜 새댁이라니, 세월이 야속하다.
60년이 다 되어가니 미국에서 자리 잡고 잘 살겠지, 엄마가 궁금해하신다. 내가 두 분을 인터넷으로 찾아볼까, 하니 엄마가 활짝 웃었다. 멀리 살아 항상 걱정만 끼치는 아픈 손가락인 내가 엄마 인생 갈피에 기분 좋은 추억 하나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메릴랜드와 테네시에 살고 계신 두 분과 통화가 되고 엄마가 미국에 오시기로 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보다 훨씬 어린 아기였던 나와 당시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이 동행하기로 했다. 두 분을 만난다는 기대만으로도 엄마는 활기를 찾으셨다. 중부시장에 가서 멸치, 북어, 김 등의 건어물을 사고 명란젓을 홈쇼핑에 주문하셨다. 알록달록 고운 수세미 뜨기도 시작했다.
메릴랜드에서 80세가 넘은 연세에도 현역 정신과 의사인 K 선생님은 한인사회에서 정신건강 강연으로 이미 유명인사였다. 골프장이 시원하게 보이는 호텔 방을 잡아주고 이틀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방학으로 집에 가 있는 동안 방세를 면제해 준 일, 화폐개혁으로 쌀을 못 사 먹을 때 엄마가 쌀을 준 일이 고마웠다고 하셨다. 가난하고 힘들던 시절이지만 마음이 따스해지는 훈훈한 추억담은 물자가 흔한 요즘보다 많으니 아이러니하다. “충청도 시골 출신이 이 정도 성공했으니 만족합니다.” K 선생님의 긍정적 마음가짐이 행복의 비결인 듯하다.
마침 자녀들을 방문하러 LA에 오시는 테네시의 H 선생님 부부까지 만나기 위해 엄마는 나와 LA로 오셨다. 엄마의 졸업선물인 미제 면도기를 미국에 가져와 오래도록 사용했다고 말씀하시며 엄마와 내 선물을 챙겨오셨다. 작년에 은퇴 후 아프리카 선교에 힘쓰고 계신단다. 하루 동안의 짧은 만남이 아쉬웠으나 남가주로 이사를 계획하신다니 훗날을 기약했다.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전문인의 삶을 살며 한국인의 성실과 끈기를 알리며 민간외교를 톡톡히 하신 두 분이다. 구글 덕분에 멋진 인생 선배 두 분을 만났다. 한국 방문했을 때 두 분 모두 삼선교 옛집을 방문했다 하니 나도 다음번 한국 여행 때 찾아 가보려 한다.
6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엄마의 오랜 인연을 찾아 두 분을 만난 것이 기적 같다. 엄마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오랜만에 효도를 한 기분이다. 인터넷을 통한 개인 정보 유출이 악용되기도 하지만, 옛날을 추억하고 미래를 기약하는 훈훈한 만남을 가지니 인터넷의 순기능이 고맙다.
최숙희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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