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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계란 껍질을 깨면

난 어렸을 적에 사람들이 멋있어 보이려고 안경을 쓰는 줄 알았다. 아니, 안경을 쓰면 멋있어지는 줄 알았다. 여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산골 학교 까까머리 중학생들의 국어 교사로 부임하신 우리 여선생님은 잘 어울리는 안경을 쓴 아담한 체격의 아주 예쁜 미인이셨다. 그의 옷매무새는 항상 세련되고 우아했다. 그의 천진스런 미소에 사춘기 소년들은 숨쉬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모두 자신들도 그런 자기의 소녀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는 유식한 고시조(古時調)를 품위 있게 외워 주셨고, 가끔 들려주신 재미있는 고사(古史)들로 우리는 문화인이 되는 흡족함을 누렸다. 그때부터 안경을 쓴 사람은 다 멋있었다. 안경에는 공부도 잘하고 깔끔한 외모에 세련된 매너가 있어 보이게 만드는 마력(魔力)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 무렵 먼 친척뻘 서울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는 음색이 무척 굵고 깊고 아름다운 선율의 한 커다란 낯선 악기를 잘 다뤘다. 첼로보다 훨씬 큰 악기였는데 그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난 잊어버렸다. 그는 이런저런 연주 여행을 자주 다니고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 생긴 부러운 녀석이었다. 사람이 너무 똑똑하고 잘생기고 뛰어나면 그것도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어린아이들까지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못된 심리(心理) 가운데 하나인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 녀석을 곧잘 골려 먹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유난히 두껍고 무거운 안경을 썼었다. 눈이 아주 나빴던 게다. 장난을 치며 실컷 약을 올려놓고는 안경을 벗겨버리면 씩씩거리면서도 우리를 잘 찾아오지 못했다. 우린 그걸 그렇게 재미있어했다. 그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고통이었는지 우리는 잘 몰랐다. 오히려 안경 없이는 찾아오지 못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그 짓궂은 장난을 거듭하고... 나쁜 놈들이지! 어린 시절은 그렇게 지나고, 잘못하면 사람이 안경 때문에 낭패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안경에 얽힌 또 하나의 추억이 내 뇌리에 쌓인 셈이다.
 
시대가 많이 흘러 이제는 안경이 아주 보편화되었다. 사방에 안경 쓴 사람이 숱하게 많고,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마저도 알고 보면 사실은 콘택트렌즈를 끼고 있다니 아마 이건 일종의 문화병인 모양이다. TV나 게임기를 좋아하는 세대, 더구나 컴퓨터에 버금가는 휴대폰에서 어딜 가든 눈을 떼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서는 희생자가 더 많이 나올 것 같다. 그래서 안경에 대한 이미지도 예전 같지 않다. 내 경우는 검정고시를 치를 때 눈을 망가트려 버렸다.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연령대에서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고 눈을 혹사했기 때문이란다. 하기야 하루에 잠을 두세 시간밖에 못 자며 오랫동안 책과 씨름했으니 심한 가성근시가 걸린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후에 점차 회복되기를 기대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가성근시는 조만간 회복될 수 있다는 얘기도 들은 데다, 안경값이 만만치도 않았고, 더구나, 자꾸만 김이 서려 불편해하는 이들을 보면서 안경 구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마침내 김포에서 일할 무렵에 눈이 몹시 아프고, 정상적으로 생활하기가 힘들어서 처음으로 안경을 하나 맞추어 쓰게 됐다. 꽤 비싸고 좋다는 안경이었다. 하지만 콧잔등이 어찌나 아프고 무거운지 나는 차라리 안경 없이 버티는 편을 택했다. 도대체 그 불편한 안경을 왜 써야 하나 하면서…
 
그런데 아무래도 이제 내 차례가 되었나 보다. 눈에 좋다는 음식을 다 찾아 먹어도 별 효과가 없다. 걸핏하면 눈이 아파서 안면 근육이 수축하니 앞사람과 마주 보고 얘기하기가 민망하다.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내가 예전과 달리 표정이 굳었다고 한다. 속 터지는 얘기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좀 힘들고 피곤하면 눈이 제일 먼저 안다. 어쩔 수 없이 의사의 조언을 구했다. 다행히 요즘 안경은 훨씬 가볍고 덜 불편하다나? 직업인의 아주 전문적 화법이다. 결국 나는 거금을 들여 두 벌의 안경과 선글라스를 맞췄다. 히야, 그런데, 눈이 덜 아픈 것만도 좋은데, 이렇게 선명한 세상도 있었다니…! 꽤 멀리 떨어진 물체도 이제 선과 색조가 뚜렷하다. 자동차 운전도 훨씬 수월해졌다. 그러면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어리석게도 많이 손해를 본 셈이다….
 
그래, 아직도 내가 알지 못하는 더 밝고 환한 세상, 더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관, 더욱 확실한 진리가 있나 보다. 내 고정관념 (固定觀念)의 틀을 벗어나면 다른 세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안경 낀 여인은 지금도 여전히 멋있고.

유진왕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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