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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공들의 계절

막 연두색에서 진초록으로 옷을 갈아입은 거리의 나뭇잎들이, 5월의 살랑대는 훈풍과 가벼운 스킨십을 나누고 있다. 아침 일찍 맥도날드에 가서 5인분의 아침 식사를 사 들고 딸네 집으로 향했다. 오늘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과 노리치의 축구 시합을 딸네와 아침을 먹으며 보려는 것이다. 잠옷 바람의 두 손주까지 아침 식사를 빌미로 아래층 TV 앞으로 불러 내렸다.
 
프리미어리그 2021~2022시즌이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시즌 득점왕을 노리는 토트넘의 손흥민 선수의 골 수는 21골, 리버풀의 살라 선수는 오늘까지 22골을 갖고 있다. 손 선수도 살라 선수도 오늘 한 게임씩을 남겨두고 있는데 살라가 마침 다쳤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우리의 바람대로 그가 오늘 게임에 결장하면 손 선수는 한 골만 추가하면 그와 공동 골든 부츠 상을 받게 되고 두 골을 넣으면 손 선수 단독 수상이다.  
 
8시 정각, 토트넘과 노리치의 게임이 시작되었는데 조금 후에 반갑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살라가 부상에도 불구하고 오늘 울버햄프턴과의 게임에 선발로 출전했다는 것이다. 그쪽에서도 손 선수의 21골을 의식했으리라. 살라가 오늘 추가 골을 넣으면 안 되는데… 결코 만만치 않은 파라오의 후예 살라,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후반 25분, 손 선수가 날아올랐다. 노리치 수비수가 실수로 놓친 공을 모우라 선수가 잡아 환상적인 턴으로 손에게 연결했고 손은 골키퍼를 앞에 두고 곧장 골문 안으로 차 넣었다. 골망이 출렁했다. 22 골, 살라와 나란히 공동 수상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손은 5분 뒤 다시 25야드 밖에서 오른발로 길게 감아 찼고 공은 꿈결처럼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23호 골, 눈 깜짝할 사이에 손은 두 골을 만들었다. 단독 득점왕이 코 앞인데 그런데 곧이어 전해진 살라의 23호 골 성공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다.  
 
23골로 손흥민은 게임을 마쳤는데 토트넘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리버풀은 아직 4분의 잔여 게임 시간이 남아 있다. 살라가 추가 골을 넣을 수도 있는 피를 말리는 4분,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기억나는 온갖 조상신께 기도하고 살라의 알라신에게도 오늘만은 대충해 주시기를 빌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4분이 지나고 살라의 추가 득점 없이 리버풀의 게임도 끝이 났다. 드디어 EPL 공동 골든 부츠 상을 수상한 손흥민은 황금빛 구두를 두 팔에 안고 한국 국가대표 A매치를 위해 그 밤에 귀국했다. 손에 든 트로피만큼이나 싱그러운 미소를 띤 채. 나이스 원 쏘니!
 
젊었을 때 숙부는 야구 국가대표 선수였다. 유난히 막냇동생을 아끼던 아버지는 숙부의 시합이 있는 날은 온 가족을 이끌고 게임이 열리는 동대문 운동장을 찾아 응원했다. 시합이 끝난 후에는 경기의 승패와 관계없이 늘 장충동 골목길에서 막국수를 먹었다.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몇 해 전 귀국길에 그 막국수 집을 찾아보았는데 찾지 못했다. LA에 정착한 뒤로는 다저스 팬이 되었는데 언제부턴가 야구보다는 축구를 보며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낀다.  
 
같은 둥근 공이지만 축구공이 선의의 공이라면 야구공은 적의를 품은 것으로 느껴진다. 마운드에 들어선 야구의 투수는 상대가 맞히지 못하기를 바라며 공을 던진다. 공을 하늘로 날려 버리든가 헛스윙해서 삼진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쫓아내려고 한다. 타자가 히트해서 일단 필드에 진출한 후에는 더욱 험난한 여정과 마주한다. 그 길에는 2루와 3루와 그리고 홈까지의 고비들이 있다. 멀리 가까이 외야수, 내야수들에게 포위되어 세 차례의 위기를 뚫고 홈인 할 때까지 홀로 외롭고 지루한 싸움을 해야 한다. 그에 반해 축구는 가장 아래의 수비수로부터 가장 위쪽 공격수의 발끝에 이르기까지 공은 열의를 담고 연결된다. 필드를 도반들과 끊임없이 함께 누비며 골을 넣기 위해 원팀 정신을 발휘하는 협동과 화합의 한 마당은 늘 가슴을 뛰게 한다.  
 
곧 월드컵이 시작된다. 주최국인 카타르의 여름 더위를 피해 이번 월드컵은 처음으로 11월에 개최된다. 한여름의 무더위와 수선스러움이 지난 후, 가을에 열리는 대회에 차분한 기대감이 차오른다. 한국은 가나, 포르투갈 그리고 우루과이와 자웅을 겨룬다. 우리 손 선수와 우루과이 국가 대표인 토트넘의 벤탄쿠르 선수가 월드컵에서 만난다. 한솥밥을 먹는 절친인 두 선수가 세계 무대에서 각기 조국의 명예를 걸고 대결하는 그날을 기다리며 가슴이 설렌다.  
 
외국팀에서 활약하는 모든 대한민국 선수가 남은 기간 소속팀에서 다치지 않고 대표팀에 합류해 월드컵에서 선전하기를 기원했는데 며칠 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마르세유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우리 손 선수가 얼굴을 많이 다친 것이다.
 
그가 부상으로부터 속히 회복되기를 염원하며 머언 동쪽 하늘 너머로 기도 한 자락을 보낸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한 때 주 너를 지키리’.

박유니스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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