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업] 나를 안아 주는 서울의 전철역
아들은 서른살 되던 해 다니던 런던의 좋은 직장에 사표를 낸 후 배낭 하나 짊어지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13개월 후 돌아왔을 때 운동화는 발가락이 삐져나올 정도로 너덜너덜했지만 건강한 모습이 반가웠다. 여행 중 위험한 곳들을 최소의 비용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원칙으로 고집했었으니 말이다. 여행 기간 아들의 생일을 맞아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일본에 있던 아들은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올 수 있는 것을 8시간 배를 타고 한국에 왔다. 아들은 “잠을 자며 올 수 있어 항공료와 호텔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벌써 십여년 전의 일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아들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세계여행하기 경쟁을 했었단다. 여행 후 아들은 “세계에서 가장 전철 내부가 깨끗하고 운행 시간을 잘 지키는 나라는 한국”이라고 말했다.필자는 1970년 초 큰 꿈을 안고 뉴욕에 도착했다. 외과 인턴으로 일하게 된 남편의 병원은 시의 남쪽에 위치한 브루클린에 있었고 아파트도 그곳에 얻었다. 반면 필자가 일했던 정신과 병원은 맨해튼시를 지나 한참 북쪽인 브롱스에 있었다.
필자의 이민 역사는 전철로 시작되었다. 세 개의 다른 도시를 매일 관통하다 보니, 중간 갈아타는 역에서 간혹 비가 새거나 하면 철길로 내려가 승차를 하기도 했다. 이른 아침 전철을 타려고 정거장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보면, 종아리에 큼직한 두드러기가 돋았다. 서울의 한겨울 추위에도 경험하지 못했던 피부 알레르기를 처음으로 겪었다. 가끔은 전철이 고장 나는 적도 있었다.
아들 말에 따르면 런던의 전철도 고장이 잦았다고 한다. 배낭여행 떠나기 전 런던에서 6년이나 직장 생활을 했으니 전철 고장으로 인한 좋지 않은 기억들이 있나 보다. 그렇다고 런던 시내로 차를 몰고 가면 도심 진입세 8파운드가 부과돼 오토바이로 출퇴근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기억들 때문인지 지난 10월 경험한 한국에서의 전철 타기는 완전 여행이었다. 전철 노선 번호와 내리는 역의 이름, 출구 번호만 듣고도 처음 가보는 치과를 단숨에 찾아 스스로 놀라기까지 했다. 미국이었다면 몇 차례 길을 잘못들은 후에야 간신히 병원을 찾아 주차하고, 이로 인해 기운이 빠져서는 어떤 치료가 필요해 치과를 찾았는지조차 잊어버렸을 텐데….
또 서울의 전철역 주변에는 맛있는 군것질거리가 얼마나 많은가. 갓 구워낸 과자, 볶은 검은 콩을 주먹만 하게 뭉쳐서 만든 콩엿, 쑥 색깔이 고운 절편 등 다양하다. 그뿐이랴. 어린 학생들이 후닥닥 들어왔다가 한줄씩 들고 나가는 김밥, 그 옆에 김을 모락모락 내며 끓고 있는 어묵, 찰 순대 등등. 이런 가게에 들어서면, 이제는 돌아가신 엄마의 부엌에 들어선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엄마가 만들어 주시던 음식들의 냄새와 맛이 그곳에 있었다.
가게를 나와서 음식을 우물거리면서 전철역 벽에 쓰인 아름다운 시들을 읽는다. 소월의 짤막한 시를 경탄하며 즐기고, 다음에는 재치와 유머가 가득한 시, 사랑이 넘치는 시, 시민의 삶이 녹아 있는 시…. 여러 종류의 시를 읽다 보면, 비록 반세기를 타국에서 살았지만 오롯이 고국의 품에 그냥 안겨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들은 서울 전철의 청결함이나 정시 운행의 장점 말고 이 아름다운 시의 세계도 보았을까?
몇 개의 멋진 시들을 사진으로 담으려다 그만뒀다. 시인들의 세계를 존중하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이 시들은 전철과 함께 있어야 더 매력적인 생명력이 있을 것 같았다.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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