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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우리말의 품격, 존댓말

한글날 무렵이면 해마다 한글 찬양의 목소리가 자못 우렁차다. 하지만, 잠시 떠들썩하고는 그만이다. 다시 돌아가서 한글 망가트리기에 여념이 없다. 세종대왕님 뵈올 낯이 도무지 없다.  
 
우리말의 대표적 자랑거리는 말의 품격이다. 그중의 으뜸이 존댓말이다. (물론, 지금 우리의 현실은 말의 품격을 이야기할 형편이 전혀 아니다.)  
 
내가 마음의 스승으로 섬겨 모시는 극작가 김희창 선생님께서는 말없이 참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이를테면, 사람 귀하게 여기는 마음, 사람다움의 향기, 말의 품격 같은… 학교나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
 
그 가르침들은 극작가로 막 등단하여 건방지기 짝이 없는 새내기였던 내게 천둥 같은 충격이었다. 특히 우리말의 오묘한 아름다움과 품격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선생님은 연배로는 거의 할아버지뻘이신데, 나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셨다. 편지에도 높임말을 쓰시고, 내 이름 아래에 학형(學兄)이나 인형(仁兄), 심지어는 대형(大兄)이라고 적으셨다.  
 
내가 황송하고 어려워서 어쩔 줄 몰라 해도, 끝까지 편하게 말을 놓지 않으셨다. 심히 어렵고 불편하고 때로는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 제자로 받아주지 않으시는구나 하는….
 
하지만,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런 품격이 그분의 일상이었다. 선생님은 마지막 선비였다. 옛 선비들은 의례 그랬다. 옛날 큰 선비들의 편지를 보면, 부인에게도 깍듯한 경어를 썼다. 일상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로 함부로 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의 품격을 중하게 여겼다. 역사를 봐도, 한반도의 양반과 지식인들은 이천 년 동안 존대법의 가치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중국어에는 존대법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리고 다른 것은 중국을 따라 하면서도 존대법만큼은 굳건하게 지켜왔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말을 배울 때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존댓말이라고 한다. 말을 높인다, 말을 놓는다, 말을 낮춘다, 말을 튼다, 토막말, 반말, 욕설 등에 들어 있는 인간관계의 질서 같은 것….
 
그럴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 같은 어른도 이름으로 함부로 부르는 식의 존댓말 없는 세상에 살았으니, 자기 부모 존함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무슨 자, 무슨 자라고 이르는 우리 문화와 언어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우리말로는 “어르신,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와 “너 몇 살이냐?”가 아주 다른 말이지만, 영어로는 그저 “How old are you?”다. 이런 것이 한글의 품격이다. 컴퓨터 자동번역기도 번역하지 못하는 품격이다.
 
물론, 존댓말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사람과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는 존대법은 비민주적 신분사회의 차별적 언어라는 주장이다. 옛날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우리말 존대법에 놀랐다고 한다.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고, 그 서열에 따라 존대와 하대의 높이를 달리하는 존대법이 만인이 평등하다는 예수의 메시지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21세기 한국인은 세상에서 가장 민주적인 문자, 한글로 극적인 민주화를 이루어 왔으면서도 가장 비민주적인 문법에서 묶여 갈등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언어학자는 존대법이 한국어 문법의 핵심인 동시에 한국인의 정신과 삶의 방식을 조정하는 근원이며,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발달한 존대법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한다.  
 
일 년 365일이 자랑스러운 한글날이었으면 좋겠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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