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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번역과 번안

노벨문학상을 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데보라 스미스가 문학가 사이에 매우 인기가 높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번역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공공연한 희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데보라 스미스가 번역한 작품을 두고 오역 논쟁도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제 문화 관련 수업 시간 중에 번역과 문화를 발표한 학생들도 채식주의자 번역에 오역이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제가 보아도 번역에는 틀린 부분이 나타납니다. 의도적이었을까요? 아니면 한국어 실력에서 온 문제일까요?   번역은 오역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오역이 언어적 차이에 의한 것인지, 문화적 차이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언어 실력에 의한 것인지에 따라 결론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단 오역에서 언어 실력에 의한 문제는 논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어로 내용은 정확하게 알았다고 해도 원저자가 전하고 싶은 내용을 전하기에는 다른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의역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의도적인 오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화적인 오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적인 내용이 지나치게 생경하거나 공감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에는 문화를 달리 번역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됩니다. 물론 언어나 문화 번역 시에 주석이나 설명을 다는 방법도 있습니다.   직접적인 번역에서 가장 멀어진 것을 우리는 번안이라고 합니다. 소설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원래의 내용과 전체적인 스토리나 소재, 대사 등은 비슷한데 등장인물이나 장소 등은 독자들이 있는 곳으로 변경되는 경우입니다. 예전에 저작권 문제가 엄밀하지 않던 시절에는 원작자의 허락 없이 번안 작품을 만드는 일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나라의 유명한 작품이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노래라면 원작자를 안 밝히는 것은 표절이겠지만 소설의 경우에는 그 기준도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스토리를 몰래 차용한 소설이나 영화 등은 여기저기에서 보입니다. 번안과 차용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로 시작하는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라는 노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번안하여 부른 것입니다. 원래 노래와 가사의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가사도 매우 좋습니다. 박효신이 부른 ‘눈의 꽃’은 일본 노래를 리메이크한 노래입니다. 가사가 거의 같다는 점에서 번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원곡을 부른 나카시마미카도 독특한 분위기로 노래를 부릅니다. 일본 노래 제목도 유키노 하나 즉, 눈의 꽃이라는 점에서 제목까지 같게 한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눈의 꽃이라는 제목은 그 제목만 봐도 일본어의 형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이었다면 눈꽃이라고 해야 합니다.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도 일본어식 표현입니다. 당연히 우리말로는 피눈물입니다.   번안 소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도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신파극으로 유명한 조중환의 ‘장한몽(長恨夢)’일 겁니다. 이 소설은 일본의 ‘금색야차(金色夜叉)’를 번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본 작품 역시 원래는 영국의 작품을 일본에서 번안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번안을 번안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안을 하면 문화와 배경, 등장인물 등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어찌 보면 문화 번역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역과 번안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만, 문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줍니다. 직역을 주로 하는 경우가 있고, 의역을 주로 하는 경우가 있고, 스토리만 남기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번역 속에서 문화의 문제를 깊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번역과 번안 번역과 번안 번안 작품 번안 소설

2024-11-17

[우리말 바루기] ‘떠벌이’는 없다

무하마드 알리라는 권투선수가 있었다. 그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말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떠벌리는 것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이처럼 자주 수다스럽게 떠들어 대는 사람을 ‘떠벌이’라 해야 할까? ‘떠버리’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떠벌이’가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정답은 ‘떠버리’다.   ‘떠벌이’와 ‘떠버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동사인 ‘떠벌이다’ ‘떠벌리다’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뭘 그렇게 떠벌이고 다니느냐?”에서와 같이 ‘떠벌리다’를 ‘떠벌이다’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떠벌이다’와 ‘떠벌리다’를 좀 더 쉽게 구분하기 위해서는 ‘벌이다’와 ‘벌리다’의 차이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벌이다’는 “잔치를 벌였다”에서와 같이 무언가를 펼치거나 늘어놓는 일에 쓰인다. ‘벌이다’에 ‘떠’를 붙여 ‘떠벌이다’고 하면 “그는 사업을 떠벌였다”처럼 굉장한 규모로 차린다는 뜻이 된다.   ‘벌리다’는 “간격을 많이 벌렸다”처럼 무언가의 간격을 넓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떠벌리다’ 역시 이야기를 점점 넓고 멀게, 즉 과장해서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정리하면 무언가를 늘어놓는 일에는 ‘벌이다’와 ‘떠벌이다’, 무언가를 넓히거나 과장하는 일에는 ‘벌리다’와 ‘떠벌리다’를 써야 한다. 우리말 바루기

2024-11-17

[우리말 바루기] ‘되세요’의 사용법

“행복한 주말 되세요!” 주말에 많이 주고받는 인사다. 이와 같은 ‘~되세요’ 형태의 인사는 평소에도 많이 사용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라는 인사가 그렇다. 그렇다면 이렇게 쓰이는 ‘~되세요’는 문제가 없는 표현일까?   ‘되다’는 “커서 의사가 되다” “개과천선해 착한 사람이 되다”에서와 같이 어떤 지위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다. 이를 명령형으로 바꿔 보면 “(너는) 커서 의사가 되어라” “(너는) 개과천선해 착한 사람이 되어라”와 같은 형태가 된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역시 “행복한 주말이 되다”를 명령형으로 바꾼 문장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행복한 주말이 되라고 하는 것일까.   듣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면 “(너는) 행복한 주말이 되어라”가 되는 셈인데, 듣는 이가 ‘의사’나 ‘착한 사람’이 될 수는 있어도 ‘행복한 주말’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는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 문장이 된다.   그럼 ‘주말’한테 ‘행복하라’고 요구하는 말일까.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덕담이나 인사말은 어떻게 고쳐 쓰는 게 좋을까.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기쁨 가득한 한 해 보내세요”와 같이 ‘보내세요’ 형태로 쓰면 된다.우리말 바루기 사용법

2024-11-14

[우리말 바루기] 밤을 지샐 수 없는 이유

우리 민족에게 내려오는 풍습 가운데 ‘수세(守歲)’라는 것이 있다. 수세는 설 전날인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집 안 구석구석에 등불을 밝히고 밤을 새우는 일을 뜻한다. 이날 밤에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지 않고 놀면서 밤을 보냈다.   어린아이들은 수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오늘은 안 자고 밤을 샐 거야”라면서 울먹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숨도 자지 않고 밤을 지낸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밤(을) 새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새다’는 잘못된 표현으로 ‘새우다’를 써야 바르다.   ‘새다’는 ‘날이 밝아 오다’는 뜻을 지닌 자동사다. 자동사는 동사가 나타내는 동작이나 작용이 주어에만 미치는 동사로, 목적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새우다’는 타동사로, 동작의 대상인 목적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와 같이 조사 ‘을/를’이 붙는 목적어 뒤에서 사용된다.   정리하면 주격조사 ‘이’가 붙는 ‘밤이’ 뒤에는 ‘새다’를, 목적격조사 ‘을’이 붙는 ‘밤을’ 뒤에는 ‘새우다’를 써야 한다.   이는 ‘지새다’와 ‘지새우다’에서도 마찬가지다. “밤이 지새도록 술잔을 기울였다”에서와 같이 ‘밤이’는 ‘지새다’와, “며칠 밤을 지새우며 공부를 했다”에서처럼 ‘밤을’은 ‘지새우다’와 짝을 이뤄 써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동사로 목적어 음력 섣달 풍습 가운데

2024-11-13

[우리말 바루기] ‘뚝배기’

‘뚝배기’는 [뚝빼기]로 소리 난다. 그렇지만 소리 나는 대로인 ‘뚝빼기’로 적지 않고 ‘뚝배기’로 적어야 한다. 하지만 ‘곱빼기, 악착빼기, 얼룩빼기, 이마빼기, 코빼기’처럼 ‘빼기’가 붙은 말도 많다. 이 말들은 소리 나는 대로 [빼기]라고 적는다.   한편으로는 ‘배기’가 붙은 말들도 있다. 나이배기, 대짜배기, 생짜배기, 알짜배기, 육자배기…. 이 말들도 소리 나는 그대로다. ‘늑대’도 [늑때]로 소리 나지만 ‘늑대’라고 적는다. ‘낙지’는 [낙찌], ‘접시’는 [접씨], ‘갑자기’는 [갑짜기]로 된소리가 난다. 그렇지만 적을 때는 ‘뚝배기’처럼 된소리를 반영하지 않는다.   이 말들의 공통점은 된소리가 나는데 그대로 적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ㄱ’과 ‘ㅂ’ 받침 뒤여서다. 우리말에서는 ‘ㄱ’ ‘ㅂ’ 받침 다음에 반드시 된소리가 난다. 이때는 된소리 표기를 하지 않는 게 한글맞춤법의 원칙이다. 그리고 한 가지가 추가된다. 뜻을 가진 가장 작은 단위인 형태소 한 개로 이뤄진 말이어야 한다. ‘뚝배기’는 ‘뚝’과 ‘배기’로 나눌 수 없다. ‘늑대, 낙지, 접시’처럼 한 개의 형태소로 이뤄져 있다. ‘ㄱ’ 받침 뒤, 한 형태소 안이어서 ‘뚝배기’로 적는다.   그런데 ‘얼룩빼기’도, ‘곱빼기’도 ‘ㄱ’과 ‘ㅂ’ 받침 뒤이지만 된소리로 적는다. 짐작하듯이 이 말들은 각각 ‘얼룩’과 ‘곱’에 ‘빼기’가 붙어 만들어졌다.  우리말 바루기 뚝배기 된소리 표기 곱빼기 악착빼기 이마빼기 코빼기

2024-11-12

[우리말 바루기] 유명세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로제가 발표한 솔로 곡 ‘아파트’가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로제의 ‘아파트’가 유튜브 조회 수 2억 회를 넘어서며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와 같은 언론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유명해졌다는 것을 나타낼 때 이처럼 ‘유명세를 떨치다’ ‘유명세를 타다’와 같은 표현을 흔히 쓰곤 한다. 그런데 ‘유명세’는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탓에 당하는 불편이나 곤욕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긍정적 표현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유명세(有名稅)’는 ‘세금 세(稅)’ 자를 써, 유명하기 때문에 치르는 불편을 ‘세금’에 비유한 단어다. 세금이 납세자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떠올려 보면 ‘유명세’가 부정적 표현에 어울린다는 걸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유명세’를 인기와 명성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흔히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유명세’를 ‘확장세(擴張勢)’ ‘증가세(增加勢)’ 등과 같이 기세를 나타내는 ‘勢(기세 세)’ 자를 쓴 ‘有名勢’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유명세’가 부정적 의미라는 걸 생각하면, 이와 호응하는 서술어도 ‘떨치다’ ‘타다’ 등보다는 ‘치르다’ ‘따르다’ 등을 쓰는 게 적합하다. 긍정적 의미를 나타내고 싶다면 “로제의 ‘아파트’가 유튜브 조회 수 2억 회를 넘어서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등처럼‘명성을 날리다’ ‘이름을 떨치다’ ‘인기를 얻다’ 등으로 표현하면 된다.우리말 바루기 유명세 부정적 표현 유튜브 조회 긍정적 표현

2024-11-11

[아름다운 우리말] 반지하와 옥탑방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후 한국 영화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한국 영화가 갑자기 세계 속으로 등장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이미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아시아를 비롯한 각지에서의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인기는 상상 이상입니다. 한국 영화의 수준과 재미가 이미 할리우드의 수준을 넘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입니다.     전 세계적인 방송의 배급이 시작되고, 코로나19라는 위기와 맞물리면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인기는 그야말로 천정부지입니다. 서구 시장에 그 시작을 알린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말에도 있었지만, 자막을 통해서 영화를 감상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미국인에게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다가가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벽을 봉준호 감독이 깨뜨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영화 기생충에서는 재미있는 번역이 많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옥스퍼드로 번역한다든지 하는 장면들입니다. ‘반지하’와 ‘짜파구리’도 번역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반지하 방에 사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서구인에게는 충격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반지하는 한국에서 서민 생활의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반지하 방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지하라는 말을 문화적으로 번역한다면 수많은 함의가 있을 겁니다.   반지하는 첫째,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입니다. 늦게 해가 뜨고 빨리 지는 어두운 곳이기도 합니다. 어두움이라는 상징이 나올 수 있습니다. 둘째, 반지하는 사생활의 보장이 되지 않는 곳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쳐다보고, 들여다봅니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엿보기도 하는 곳입니다. 쳐다보는 게 싫어서 하루 종일 커튼을 치기도 합니다. 더 어두워지는 곳이지요. 셋째, 비가 오면 비가 새고, 먼지가 들이닥치는 위험하고 지저분한 곳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안락해 보이기도 하지만 언제든 인생의 종말로 갈 수도 있는 곳입니다.   반지하라는 공간은 가상의 공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서울의 수많은 사람이 반지하에 살고 있습니다. 해마다 장마철이 되고, 태풍이 불면 반지하는 늘 아슬아슬한 장소입니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해가 발생하면 늘 제일 먼저 비추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평상시에는 제일 늦게 보여주던 곳인데 말입니다. 반지하라는 공간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 주거의 빈부 차이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반지하와 반대되는 공간이면서 낭만적인 공간처럼 나오는 곳도 있습니다. 바로 옥탑방입니다. 옥상에 있는 작은 방에서 사는 모습이 드라마와 영화에 자주 등장합니다. 시야가 탁 트이고, 화려한 네온사인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죠. 종종 친구들과 모여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옥탑방은 때로 비가 새고, 춥고 더운 곳이고, 매우 저렴한 주거공간입니다. 반지하를 옥상으로 올려놓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지하가 가족의 공간이라면 옥탑방은 가난한 청년의 공간입니다. 서양의 펜트하우스와는 그야말로 거리가 멉니다. 천지 차이의 공간입니다. 그래도 옥탑방이 한국인에게 낭만으로 기억되는 것은 다행입니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의 주거문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밝은 곳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많습니다. 부잣집의 건물은 주로 갤러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화려한 건축물이나 넓은 마당의 저택이 많이 나오지만 실제로 한국에서 찾아보기 쉬운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반지하와 옥탑방은 찾으려고만 마음을 먹으면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어두운 측면도 문화입니다. 어두운 부분, 어려운 부분에 대한 이해도 문화 이해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반지하 옥탑방 반지하가 가족 한국 영화 한국 드라마

2024-11-10

[우리말 바루기] 이어지는 문장

“그가 새로 참여해 주말마다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 무대를 꾸민다.” 이런 문장들이 은근히 있다. ‘참여해’에 ‘-여’가 있는데, 뒤쪽 ‘가르쳐’에도 ‘-여’가 나온다. 이러면 읽기가 편치 않다. 뜻도 바로 전달되지 않는다. ‘참여하다’ ‘가르치다’ ‘꾸미다’ 등 여러 정보가 한 문장에 무리하게 들어가 있다. 다음처럼 두 문장으로 나누는 게 낫다. “그가 새로 참여해 무대를 꾸민다. 그는 이 무대를 위해 주말마다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친다.”   “상대 팀의 초반 공세에 밀려 더 나은 전력인데도 잇따라 실점해 쉽게 무너졌다” 역시 읽기가 부담스럽다.  ‘밀려’ ‘실점해’의 ‘-여’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실점하다’를 ‘실점해’ 형태로 가지 않아도 되는 문장이었다. ‘실점해’ 대신 ‘실점하는 등’이라고 하면 자연스러워진다. 문장을 두 개로 나누면 더 간결하다. “더 나은 전력인데도 상대 팀의 초반 공세에 밀렸다. 경기 초반에 잇따라 실점해 쉽게 무너졌다.”   “귀찮아서 소파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에서는 ‘-아서’가 이어졌다. 그렇다 보니 문장 전체의 길이는 짧지만 간결해 보이지 않는다. 같은 형태의 반복이 흐름을 꺾어버리고 만 것이다.   “귀찮았기 때문에 소파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글맛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면 “너무 귀찮았다. 그래서 소파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도 괜찮겠다. 우리말 바루기 문장 문장 전체 초반 공세 경기 초반

2024-11-10

[우리말 바루기] ‘운명’을 달리하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엄숙하다.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불교계에선 승려가 죽었을 때 ‘입적(入寂)’이라 한다. ‘고요한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 ‘번뇌나 고뇌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열반(涅槃)’이라고도 한다. 개신교에선 ‘하늘의 부름을 받아 돌아간다’는 뜻으로 ‘소천(召天)’이란 표현을 쓴다. 가톨릭에선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이란 의미로 ‘선종(善終)’이라 한다. 천도교에선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에서 ‘환원(還元)’이라 부른다.     언론 매체의 부음 기사에서는 ‘사망’ 외에 ‘별세(別世)’ ‘타계(他界)’ ‘서거(逝去)’ 같은 말들이 흔히 보인다. 이 가운데 ‘사망’을 빼면 다 죽음을 높인다. ‘별세’의 사전적 의미는 “윗사람이 세상을 떠남”이다. ‘타계’는 “인간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간다”는 뜻이다. ‘서거’는 “죽어서 세상을 떠남”이란 말이지만, 대통령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만 쓴다. 언론 매체는 마음대로 이 말들에 서열을 정해 놓았다. 사망, 별세, 타계, 서거 순으로 높아진다.   일상에서는‘숨지다’ ‘돌아가시다’ ‘작고(作故)하다(고인이 되다)’ ‘영면(永眠)하다(영원히 잠든다)’라고 한다. ‘운명(殞命)하다’도 ‘목숨이 끊어지다’라는 말이다. 그러니 ‘운명을 달리하다’는 어색하다. ‘달리하다’는 ‘유명(幽明)’과 어울린다. ‘유명’은 저승과 이승을 가리킨다.우리말 바루기 운명 사망 별세 언론 매체 사전적 의미

2024-11-07

[우리말 바루기] 불필요한 ‘그’

‘그’는 편리하다. 가까운 식탁에 있는 사과를 달라고 할 때 ‘그’가 있어서 “그 사과 좀 줘”라고 말할 수 있다. “식탁에 있는 사과 좀 줘”라고 하는 것보다 짧고 효율적이다. 앞에서 말한 대상을 가리킬 때도 ‘그’는 유용하다. “얼마 전 봐 둔 옷이 있어. 그 옷 사려고”라고 하면 된다. ‘그’는 또 다음처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알고 있는 대상을 가리킬 때 쓰인다. “아까 크게 웃던 그 사람이 대표야.” 이 문장에서 ‘그’는 ‘사람’을 더 선명하게 한다.   여기까지는 ‘그’가 가리키는 대상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다음의 ‘그’는 대상이 확실하지 않다.‘그’는 이럴 때와 어떤 일을 명확하게 밝히고 싶지 않을 때도 쓰인다. “지식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대상이 확실치 않으니 ‘그’라고 해야 했다.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보이는 ‘그’는 분명하게 대상을 밝히고 싶지 않았서였겠다. 이렇게 막연한 ‘그’는 말에서보다는 글에서 주로 보인다. 그런데 문학적 ‘막연함’은 상상력을 북돋우지만, 실용적이어야 하는 글에서는 ‘그’가 거추장스럽다.   “최종 점검하는 부서에서 그 이행 성과를 부풀렸다.” “대통령 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오면서 그 결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문장 구조가 다르다. 그 의미 또한 다르다.” ‘그 이행 성과’ ‘그 결과’ ‘그 의미’라고 표현했다. ‘그’가 필요했을까. 없는 게 간결하고 낫다. 우리말 바루기 불필요 이행 성과 문장 구조 대통령 선거

2024-11-06

[우리말 바루기] ‘서울말’의 반전

첫 서울살이에 나서는 지방 사람들도 서울말이 어색하기는 매한가지다. “그건 아니구요” “비가 올 것 같애요”와 같은 말을 따라 하며 차이를 실감한다.   일반적으로 서울말과 표준말을 동일시하지만 둘은 같다고 할 수 없다. “그건 아니고요” “비가 올 것 같아요”로 사용해야 표준어다.   표준어 규정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서울 토박이가 쓰는 말이 표준어의 기초가 됐지만 표준말은 아니다. 서울 사투리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서울말은 넓은 의미에서 경기 방언 중 하나다.   ‘-구요’로 발음하는 게 대표적이다. 입말에서 “뭐라구요” “안 된다고 생각하구요” “고민도 되구요”처럼 끝맺는 경향이 있다. 상대편의 어떤 말에 대한 대꾸의 성격을 띠는 종결어미 ‘-고’와 보조사 ‘요’가 결합한 형태이므로 ‘-고요’로 적고 읽어야 한다. ‘뭐라고요’ ‘생각하고요’ ‘되고요’로 고쳐야 바르다. 대개 방언이라기보다 구어체로 인식하지만 ‘-구’로 끝나는 어미는 없다.   연결어미 ‘-고’를 ‘-구’로 발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겨울바다도 보구 회도 먹구 즐거웠어요”와 같이 이야기할 때가 많다. ‘보고’ ‘먹고’가 표준어다.   ‘같아요’를 ‘같애요’로 발음하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아요’는 설명·의문·명령·청유의 뜻을 나타내는 종결어미다. 어미 ‘-아’와 보조사 ‘요’가 결합한 말이다. ‘-애요’ 형태의 어미는 없다.우리말 바루기 서울말 반전 현대 서울말 표준어 규정 서울 토박이가

2024-11-05

[우리말 바루기] ‘낮으막한’

친구한테 문자가 왔다. “이번 주말에 낮으막한 산에 가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라는 내용이었다. 위치나 소리가 꽤 낮다는 것을 나타낼 때 이처럼 ‘낮으막하다’고 쓰는 사람이 많다.     ‘낮다’를 떠올리면서 ‘낮으막하다’로 적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나지막하다’가 맞는 표기다. ‘낮다’의 원형을 생각하면 ‘낮으막하다’가 맞을 것 같지만 ‘나지막하다’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나지막하다’를 ‘나즈막하다’로 쓰는 이도 있다. ‘낮은’의 발음을 따라 ‘나즌→나즈막’과 같이 연상해 이렇게 쓰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지막하다’는 ‘낮다’가 아닌 ‘나직하다’에서 온 말이므로 ‘나지막하다’로 적어야 한다.   참고로 우리말에서 ‘-즈막하다’로 끝나는 단어는 없다. ‘큼지막하다’ ‘높지막하다’ ‘느지막하다’처럼 ‘-지막하다’로 끝나는 단어만 존재한다.   이와 비슷하게 ‘늘그막’을 ‘늙으막’으로 잘못 쓰는 경우도 있다. ‘늙다’를 활용해 명사형으로 만들 때 ‘늘금’이 아니라 ‘늙음’이라 하는 것처럼 원형을 살려 ‘늙으막’이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한글맞춤법은 어간에 ‘-이, -음’이 아닌 그 외 모음으로 시작된 접미사가 붙어 다른 품사로 바뀐 말은 그 어간의 원형을 밝히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고 규정하고 있어 이를 따라 ‘늘그막’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얕으막하다’는 어떻게 될까? 이 역시 ‘야트막하다’가 표준어다.우리말 바루기 이번 주말

2024-11-04

[우리말 바루기] 거둬들였다

다음 중 맞는 표현을 고르세요.   ㄱ. 세금을 걷어들였다 ㄴ. 세금을 거둬들였다   여러 사람에게서 돈이나 물건 등을 받아서 들여오거나 좋은 결과 또는 성과 등을 얻어 낸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걷어들이다’ ‘거둬들이다’ 어느 것을 써야 할지 헷갈린다. ‘걷어들이다’와 ‘거둬들이다’의 발음이 비슷하다 보니 표기에서도 혼동이 오는 것으로 보인다.   ‘거둬들이다’의 발음은 [거둬드리다]이지만 이를 [거더드리다]와 같이 발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소리를 따라 ‘걷어들이다’로 적는 경우가 생기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바른 표현은 ‘거둬들이다’이므로 잘못 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거두다’의 준말은 ‘걷다’이다. “답안지를 거두어 갔다”는 “답안지를 걷어 갔다”, “회비를 거두었다”는 “회비를 걷었다”로 바꿔 쓸 수 있다.   따라서 ‘걷다’를 활용한 ‘걷어’에 ‘들이다’를 붙이면 ‘걷어들이다’가 되기 때문에 이것이 맞는 표현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를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거두어들이다’의 준말인 ‘거둬들이다’만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다. 즉 ‘거두어’를 줄인 ‘거둬’에 ‘들이다’를 붙인 형태인 ‘거둬들이다’가 옳은 표현이다.   그러므로 “지난해 창립 이후 최대 수익을 거둬들였다” “세 개의 금메달을 거둬들였다” 등과 같이 써야 바르다. 서두의 문제도 ‘ㄴ. 세금을 거둬들였다’가 바른 표현이다.우리말 바루기 최대 수익 지난해 창립

2024-11-04

[아름다운 우리말] 사극 번역의 세계

한류를 이끈 드라마에는 특별한 소재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한국의 전통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만의 소재였습니다. 우리 역사가 소재가 되는 게 우리에게는 당연하겠지만 외국인도 좋아한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고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대장금이 엄청나게 인기가 높을 때는 일회적인 현상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중국은 물론이고 남아시아, 중동 등에서도 인기가 정말 대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주몽이 인기가 높아졌을 때는 의아함이 커졌습니다. 왜 한국의 사극이 이렇게 인기가 있을까요? 한국의 역사적 내용이나 복장, 전통문화에 대하여 외국인은 이해가 가능할까요?   물론 한국 사극의 인기는 스토리 전개의 힘과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장금과 주몽뿐 아니고 그 후에도 사극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외국에는 한국 사극의 광팬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한국 역사드라마의 모든 내용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의 역사를 더 많이 아는 느낌이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들도 정확히 알고 있고, 역사적인 시기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만난 한국 드라마 팬 중에는 한국 사극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를 배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생각해 보면 사극이 참 많습니다. 한국 사극에 매력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삼국시대의 주몽이나 태왕사신기, 연개소문이 있고 우씨 왕후, 선덕여왕 등이 있습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나 고려 시대의 태조 왕건이나 고려 거란전쟁, 기황후 등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경우에도 엄청나게 사극이 많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드라마도,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숙종부터를 살펴보면 그 면면이 화려합니다. 숙종의 부인인 ‘장희빈’이나 ‘인현왕후’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있고, 또 다른 부인인 영조의 어머니인 ‘동이’가 있습니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 이야기가 있고, 손자인 정조 ‘이산’ 이야기도 있습니다. 조선말의 ‘대원군’이나 ‘명성황후’도 있습니다.   다양한 인물을 다루기도 합니다. 그중에는실재 인물이 아닌 경우도 있고, 실재 인물이라고 하여도 극히 일부분만 소재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대장금이나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허준, 황진이, 어사 박문수, 신돈 등도 그런 이야기에 속합니다. 퓨전 사극의 유행도 대단합니다. 소재만 사극의 형식을 빌려온 것입니다. 역사와는 거의 관계가 없고, 옷이나 전통적인 내용만 담겨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균관 스캔들은 중동지역까지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해를 품은 달, 달의 연인, 다모, 구르미 그린 달빛, 슈룹 등 수많은 이야기가 사극으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이제는 과거로 타임 슬립을 하거나 반대로 과거 사람이 현대로 오는 이야기 등에서도 사극의 향기를 맡게 됩니다. 과거에서 온 ‘도깨비’나 과거로 간 ‘철인왕후’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제는 좀비 영화에도 사극이 등장합니다. ‘킹덤’은 좀비 사극입니다.     그런데 사극의 인기를 보면서 의아한 점은 또 있습니다. 바로 번역입니다. 때로는 한국인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투가 있습니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라든지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등은 어떻게 번역할까요? 내용뿐 아니라 그 분위기의 번역이 쉽지 않을 겁니다. 다양한 전통적인 소재는 번역이 매우 어려울 겁니다. 대장금에 나오는 음식에 관한 설명이나 허준에 나오는 한의학에 관한 설명도 무척 어려웠을 겁니다. 직위에 대한 번역도 쉽지 않습니다. 영의정이나 판서, 사또나 이방은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요?   사극을 정확하게 그 맛을 살리며 번역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합니다. 한국어의 수준도 더 높아져야 합니다. 한국어, 한국문화 교육의 갈 길이 멉니다. 세계인이 좋아하는 한국의 사극을 맛있고, 멋있게  번역하기 위해서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있기 바랍니다. 조현용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사극 번역 사극 번역 한국 사극 한국 역사드라마

2024-11-03

[우리말 바루기] ‘거예요’

꽃이 곧 필 (거에요/거예요). 괄호 안에 있는 ‘거에요’ ‘거예요’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는 말일까? ‘-에요’와 ‘-예요’는 누구나 헷갈리는 말이다.   우선 ‘예요’는 ‘이에요’가 줄어든 말이다. 여기에서 ‘이’는 명사를 서술어로 만들 때 쓰이는 조사다. 즉 명사를 서술어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가 첨가된다. ‘거’는 ‘것’을 구어적으로 이르는 말로 명사다. 따라서 명사인 ‘거’를 서술어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가 추가된다. 그래서 ‘거+에요’가 아니라 ‘거+이+에요’ 형태가 되고 ‘거이에요’가 줄어 ‘거예요’가 되는 것이다.   명사의 경우 받침이 있으면 ‘이에요’, 없으면 ‘예요’와 결합한다. ‘책+이에요→책이에요’ ‘꽃+이에요→꽃이에요’ 등은 받침이 있는 명사여서 ‘이에요’가 붙은 경우다. ‘저+예요→저예요’ ‘나무+예요→나무예요’ 등은 받침이 없는 명사여서 줄임말인 ‘예요’가 붙은 예다.     그렇다면 ‘아니에요/아니예요’는 어느 것이 맞을까? 명사가 아닌 용언(동사·형용사)의 어간과 직접 결합할 때는 서술격 조사 ‘이’가 필요 없으므로 ‘에요’만 붙는다. ‘아니다’의 경우 어간이 ‘아니’이므로 ‘아니+에요→아니에요’가 된다.   명사일 때는 받침이 있으면 ‘이에요’, 없으면 ‘예요’가 자연스럽게 발음되기 때문에 헷갈릴 염려가 많지 않다. ‘아니에요’처럼 동사와 형용사의 경우 어간에 ‘에요’가 붙는다는 사실에 주의하면 된다.우리말 바루기 서술격 조사

2024-11-03

[우리말 바루기] ‘~와의’ 표현

다음 중 적절한 표현을 고르시오.   ㄱ. 중국과의 경기에서 이겼다.   ㄴ. 중국과 경기에서 이겼다.   ㄱ에 나오는 ‘~과의’가 일본식 표현이므로 ‘ㄴ.중국과 경기’가 맞다고 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과의’가 일본식 어법에서 온 것은 맞다. 일본식 이중조사인 ‘~との’를 그대로 옮기면 ‘~과의’가 된다. 우리말에선 과거에는 쓰지 않던 표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의’가 일본식 표현이므로 ‘의’를 빼고 ㄴ처럼 ‘중국과 경기’라고 하면 될까? 그렇지 않다. ‘중국과 경기’는 불완전한 표현이다. ‘중국과 벌인 경기’처럼 서술어를 첨가해야 온전한 말이 된다. 그러다 보면 말이 길어진다.   그렇다 보니 훨씬 간결한 ‘중국과의 경기’ ‘노조와의 협상’ 같은 ‘~과의’ ‘~와의’ 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다. 간결성을 이길 표현은 없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도 이런 현실을 인정해 ‘~와의’ 표현을 사전에 올렸다. ‘의’의 용법 가운데 ‘저자와의 대화’란 예문을 들어 놓았다. 국어원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인접 언어는 서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타 언어의 영향을 어디까지 인정할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참으로 어렵다. 일본어의 영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결론적으로 ‘~과의’ ‘~와의’ 표현을 써도 된다.  정 이 표현이 내키지 않는다면 ‘ㄴ. 중국과 경기’가 아니라 ‘중국과 벌인 경기’라고 해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표현 인접 언어 용법 가운데

2024-10-31

[우리말 바루기] ‘떼려야’

치킨과 맥주, 삼겹살과 소주, 햄버거와 콜라…. 하나를 들으면 다른 하나가 저절로 떠오르는 관계다. 즉 둘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이러한 관계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는 없다. 왜냐하면 ‘뗄래야’라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뗄래야’는 붙어 있거나 잇닿은 것을 떨어지게 한다는 뜻을 지닌 ‘떼다’의 어간에 어미 ‘-ㄹ래야’가 붙은 구조다. 하지만 ‘-ㄹ래야’는 존재하지 않는 어미로 ‘-려야’가 맞는 말이다. 따라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바꾸어야 한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 “갈래야 갈 수 없는 곳” “볼래야 볼 수 없는 사람” 등의 표현도 흔히 볼 수 있다. 이 역시 ‘-ㄹ래야’가 아니라 ‘-려야’가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 “가려야 갈 수 없는 곳” “보려야 볼 수 없는 사람”으로 고쳐야 한다.   ‘-려야’는 ‘-려고 하여야’가 줄어든 말이다. 위의 예문을 모두 풀어 써 보면 ‘떼려(고 하여)야’ ‘끊으려(고 하여)야’ ‘보려(고 하여)야’ ‘가려(고 하여)야’가 된다. 풀어 쓴 형태를 보면 ‘뗄래야’ ‘끊을래야’ ‘볼래야’ ‘갈래야’ 모두 ‘ㄹ’이 불필요하게 덧붙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혹 “뗄려야 뗄 수 없는 사이” “지울려야 지울 수 없는 기억”에서와 같이 ‘-ㄹ려야’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역시 잘못된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려야’를 붙여 ‘떼려야’ ‘지우려야’로 써야 바르다.우리말 바루기 소주 햄버거 맥주 삼겹살 표현 자체

2024-10-30

[우리말 바루기] 뵈요? 봬요?

문자메시지에서 눈에 자주 띄는 말이 '뵈요'다. "내일 뵈요" "이따 뵈요" "다음에 뵈요"와 같은 표현이다. 맞는 표기일까?     '뵈다'의 어간은 '뵈'이다. 여기에 '고' '니' '면' 등 연결어미가 붙을 때는 그대로 결합하면 된다. 즉 '뵈고 뵈니 뵈면' 등이 된다. 문제는 존대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인 '요'가 붙을 때다.   '요'는 어간과 바로 결합하지 못한다. 어미인 '어'를 추가해야 한다. '먹다'의 '먹'에 '요'를 붙일 때 '먹요'가 되지 못하고 '먹어요'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뵈'에 '요'가 붙을 때는 그대로 '뵈요'가 되는 게 아니라 '어'가 추가돼 '뵈어요'가 된다. '뵈어'가 줄면 '봬'가 되므로 '뵈어요'는 줄어 '봬요'가 된다. 실제 말할 때는 '뵈어요'보다 준말인 '봬요'가 많이 쓰인다. 헷갈리기 쉬우므로 '봬요'의 철자를 외워 두는 것이 좋다.   '뵈요' '봬요'와 더불어 '뵜다' '뵀다'도 혼란스럽다. '뵈다'의 과거형은 '뵈+었+다' 형태로 '뵈었다'가 된다. 이 자체로는 문제를 느낄 것이 없으나 이것이 줄어드는 경우다. '뵈었다'가 줄면 '뵜다'가 아니라 '뵀다'가 된다.     그렇다면 "내가 이래 (뵈도/봬도) 왕년에 선수였다"에서는 어느 것이 맞을까? '뵈+어도'의 준말이므로 '봬도'가 맞는 말이다. '뵈서' '뵜습니다'도 마찬가지로 '봬서' '뵀습니다'가 맞는 표기다.우리말 바루기

2024-10-29

[우리말 바루기] '나지막한'

친구한테 문자가 왔다. “이번 주말에 낮으막한 산에 가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라는 내용이었다. 위치나 소리가 꽤 낮다는 것을 나타낼 때 이처럼 ‘낮으막하다’고 쓰는 사람이 많다. ‘낮다’를 떠올리면서 ‘낮으막하다’로 적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나지막하다’가 맞는 표기다. ‘낮다’의 원형을 생각하면 ‘낮으막하다’가 맞을 것 같지만 ‘나지막하다’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나지막하다’를 ‘나즈막하다’로 쓰는 이도 있다. ‘낮은’의 발음을 따라 ‘나즌→나즈막’과 같이 연상해 이렇게 쓰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지막하다’는 ‘낮다’가 아닌 ‘나직하다’에서 온 말이므로 ‘나지막하다’로 적어야 한다.   참고로 우리말에서 ‘-즈막하다’로 끝나는 단어는 없다. ‘큼지막하다’ ‘높지막하다’ ‘느지막하다’처럼 ‘-지막하다’로 끝나는 단어만 존재한다.   이와 비슷하게 ‘늘그막’을 ‘늙으막’으로 잘못 쓰는 경우도 있다. ‘늙다’를 활용해 명사형으로 만들 때 ‘늘금’이 아니라 ‘늙음’이라 하는 것처럼 원형을 살려 ‘늙으막’이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한글맞춤법은 어간에 ‘-이, -음’이 아닌 그 외 모음으로 시작된 접미사가 붙어 다른 품사로 바뀐 말은 그 어간의 원형을 밝히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고 규정하고 있어 이를 따라 ‘늘그막’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우리말 바루기 이번 주말

2024-10-28

[아름다운 우리말] 무시, 무시하다

무시(無視)한다는 말은 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상대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상태를 깔본다고 합니다. 내려다본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물론 아예 보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이니 강도는 훨씬 셉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무시를 ①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함. ②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김이라고 설명합니다. 무시가 안 보는 것이 원래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내려 보는 느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시하다는 말을 한국말로 하면 못 본 척이 아닐까 합니다. 봐도 못 본 척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나를 본 것이 분명한데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면 기분이 상합니다. 인사는 사람의 일이라는 뜻인데, 인사를 안 했다는 것은 사람의 일을 안 한 것이고, 나를 사람 취급 안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저 사람은 무시해도 좋다는 말을 들으면 참을 수가 없을 겁니다.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방식으로 말하자면 투명 인간 취급한 겁니다.     무시하다에 해당하는 우리말인 ‘업신여기다’는 방언에 ‘업시여기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말은 ‘없이 여기다’로 볼 수 있습니다. 무시하다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본 척도 안 하고, 들은 척도 안 하고, 아는 척도 안 하는 것은 모두 무시하는 겁니다. 무시하는 게 안 좋은 거죠.   그런데 무시해도 좋은 게 있습니다.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것을 무시하면 좋을까요? 우선 상대가 숨기고 싶은 것이라면 못 본 척해주는 게 좋을 겁니다. 혹시라도 봤다면 아예 잊으면 더 좋을 겁니다. 굳이 아는 척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줄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내가 본 것을 상대가 알아차린다면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하여도 좋습니다. 모르는 척도 배려입니다.     저는 무시의 상반되는 상황을 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다’에 해당하는 우리말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깔보다와내려다보다도 있습니다만, 반대로 올려보다나치켜뜨다도 있습니다. 반항의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화가 났을 때는 노려보다, 째려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보는 게 감정을 싣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보는 것 중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살펴보다와돌보다입니다. 살피는 것도 보는 것이기에 살펴보는 것은 같은 의미의 단어가 겹쳐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조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살피는 것과 두리번거리는 것은 다르다고 봅니다. 무엇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살펴보는 것은 혹시 불편한 점이 있는지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보다는 돌아보다가 줄어든 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말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돌보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찾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을 돌아보거나 건물을 돌아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살피는 것입니다. 따라서 돌본다는 말에서는 세밀한 관심이 느껴집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그런 느낌의 표현입니다.   무시하지 않는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보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화가 나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살피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돌보는 삶이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집니다. 내 눈의 온도를 생각해 보세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무시 우리말 표현 사람 취급 존재 의의

20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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