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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아내의 생일

신호철

신호철

창 밖은 아직 어둑하다. 별빛도 달빛도 사라지고 잔뜩 찌푸린 구름이 펼쳐진 하늘은 검은 잿빛이다.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밖으로 나섰다. 집 앞 보드 블락이 젖은 걸 보니 간 밤에 비가 내렸나 보다. 집 주위를 한 바퀴 돌고 호수 쪽으로 가 보려고 한다. 쌀쌀해진 새벽 공기에 다시 점퍼를 걸치고 나왔다. 역시 새벽은 맑고 깨끗하다. 내 몸 가득 새벽공기를 마시면 어느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풀벌레들은 아직 잠들었는지 사방엔 기척이 없다. 나무와 가로등은 깨어 있는 듯 멀리서 다가오는 나를 반겨 준다.
  
어제는 아내의 생일이었다. 늘 아내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챙겨준 기억이 별로 없다.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서운하고 야속하게 느껴질 테지만 아내는 그 점에 큰 문제를 삼지 않았다. 남편으로서 미안하고 감사했다. 왠지 우리 사이에는 생일은 간단한 외식 정도로 지나가는 것으로 묵인되었다. 그렇다고 무심히 지나간 것은 아니었고 늘 주변에서 생일 파티를 열어 주었다. 아이들이 커서는 아이들이 계획한대로 깜짝 파티를 열어 주기도 했다. 나는 늘 아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다. 아내는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는 편이다. 듣고 보면 늘 맞는 말이었다. 무심히 지나 버린 세월이었지만 이렇게 한적한 새벽 길을 걷다 보면 늘 나를 배려해주는 아내 마음이 새삼 느껴진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아내와 함께 늘 걸었던 산책 길이다. 아이들 커가는 이야기도 하면서 이제 막 태어난 손자 손녀 이야기도 하면서 걸었던 길이다. 이 집 정원엔 작은 묘목들이 필요할 것 같고, 저 집 드라이브웨이는 휘어져있어 운치가 있고, 저 집은 큰나무들이 입구를 가려 나무 한 그루를 잘라야 할 것 같다는 둥 동네 구석구석을 상관하고 다녔다. 산책 길을 걷다 보면 두 세 블락 떨어진 곳에 가지가 쭉 뻗은 소나무 두 그루가 늘 인상적이었다 그 곁을 지나칠 때면 소나무 향이 코끝에 향기롭게 스며든다. 부시시한 머리처럼 많은 잎을 담고 있는 나무는 아니지만 간결하고 깨끗한 솔잎을 가지런히 담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소나무는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희미했던 주변이 점점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니 날이 밝고 있다. 시야가 확 트이는 호숫가로 다가 가고 있다. 호수는 나에게 참으로 고마운 장소이다. 마음이 불편할 때 늘 찾아 왔던 장소였다. 잔잔한 물결로 반겨주는 호수는 늘 평안하고 그윽했다. 가끔 긴 다리를 가진 하얀 깃털의 두루미를 만나면 반갑기도 했다. 가족의 소중함은 비단 인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뒤뚱뒤뚱 아직 어린 오리 새끼를 뒤돌아 서서 기다리는 어미 오리의 모습은 제 자식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과 꼭 닮았다.  
 


애지중지 키워 왔던 두 아이는 이제 가정을 꾸미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때로는 힘겨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지나온 우리로서는 그저 피식 웃고 지나갈 일이었다. 지난 우리의 삶도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중압감으로 잠 못 이뤘던 많은 밤들이 있었지만, 먼동이 트고 하루가 밝아 오는 행복한 시간도 어느 사이 우리 옆에 다가오곤 했었다.  
 
오랜 시간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은 목표를 향해 걸었던 우리였지만 서로에게 이상하리만큼 표현 하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후회가 된다. 마구 사랑하고 싶고 나 역시 사랑 받고 싶다. 100세 시대라는 요즈음 부지런히 운동도 하고 몸에 좋다는 음식도 챙겨 먹고 여행도 많이 다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마음 속에 사랑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호숫가를 걸을 때는 늘 평안했다. 멀리 집들의 불빛이 흐려지고 하루가 밝아 오고 있다. 집을 나오면서 내려 놓은 커피가 은은한 향기를 풍기듯 그렇게 향기로운 하루를 맞이하고 싶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지만 왠지 이런 날 아내와 창가에 앉아 커피잔을 기울이며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집으로 향하는 발길이 서둘러진다.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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