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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엘비스 프레슬리를 그리며

며칠 전에 ‘엘비스’란 영화를 참 감명 깊게 봤다. 대학교 다닐 때부터 엘비스 프레슬리의 열렬한 팬이었다. 프레슬리가 42세의 나이에 죽었을 때도 매우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 그의 노래도 좋아했고 풍기는 외모도 한 몫을 더 했다. 작년에 그의 전기를 읽고 그가 살았던 집 그레이스랜드(Graceland)가 참 인상 깊게 남아있다.
 
더욱이 그는 가스펠 송을 많이 불렀는데 ‘How Great Thou Art’를 불렀을 때 마음에 울림이 많았다. 그는 교회에서 성가를 많이 불렀다. 바쁜 일정 때문에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다녔는지는 나는 잘 모른다. 그는 마음이 참 선량했다. 노래를 불러 돈을 많이 벌어도 구두쇠처럼 인색하지 않았다. 하와이 공연 갔을 때도 펄 하버 박물관(Pearl Harbor Museum)에 거금을 희사했고 여러 자선단체에도 많은 기부를 했다고 한다.
 
그는 1935년 1월 8일 미시시피주 투펠로라는 곳에서 아버지 버논과 어머니 글래디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동생은 숨진 채 태어났다. 그래서 외동아들로 자랐다. 철이 들면서 동생을 생각하며 무덤에 자주 찾아갔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를 무척 사랑하고 좋아했다. 그가 군에 입대하여 서독에 복무하러 떠나기 전 어머니가 숨져 참 슬퍼했고 마음이 울적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혼을 했다. 엘비스는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1954년부터 가수로서 정식으로 선 레코드사와 계약을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55년 후반에 RCA 빅터 회사에 계약이 넘겨져 1956년 부터 국제적인 가수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엄청난 숫자의 음반이 팔렸다. 콘서트도 많이 열고 라스베이거스 무대에서도 명성을 떨치면서 많은 공연을 했고  프랑크 시나트라와  TV에도 출연했고, ‘에드 설리번 쇼’에도 등장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몸을 너무 흔드는 바람에 외설적이라는 논란도 있었지만, 곧 가라앉았다. 33개의 영화에도 출연하고 해서 엄청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음악상도 무척 많이 받았다. 그중에 그래미상(Grammy Awards)을 3개 받았고 14번이나 지명되기도 했다. 36세에 그래미 평생 성취 상( Grammy Lifetime Achievement Award)도 받았다.  
 
1958년에 군에 입대하여 1960년 까지 독일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복무 기간 동안 1959년 9월 13일 항공병(Airman)의 딸 프리실라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14세였다. 엘비스는 첫눈에 반해 서로 사랑을 하며 구애를 해서 7년 반 후인  1967년 5월 1일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6년 후 1973년 이혼을 하고 만다.  
 
이혼으로 마음이 울적한 데다 엘비스는 과도한 연출 스케줄로 피로가 쌓이고 잠이 부족해 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에 돌아온 후 매니저가 모든 재정과 연출 스케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1969년부터 1977년까지 라스베이거스의 인터내셔널 호텔에서 636개의 레지던시 쇼를 하게 했고 일주일 내내 공연 중 밤 콘서트를 두 번이나 하도록 했다. 엘비스는 너무 지쳐 있었고 과로를 하게 되었다.
 
매니저 톰 파커는 엘비스가 번 돈 절반 이상을 착취했고 엘비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는 악덕 업자였다.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을 닮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엘비스는 아버지에게도 돈을 많이 보내 주었는데 어디에다 돈을 다 썼는지 돈이 없다고 항상 돈을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천재적인 음악성으로 짧은 생애 동안 부와 명성을 많이 얻었지만, 사람 복은 없는 사람이었다. 첫째 가장 믿었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계모와 살면서 돈을 모두 탕진해 버렸고 항상 붙어 다니던 매니저는 자기 주머니에 돈 착복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고 사랑하던 아내와는 결혼 6년 만에 이혼하게 되었다. 엘비스는 이혼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아내가 요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혼하게 되었다. 그 후 늘 마음이 공허했던 그는 아내가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원하는 노래를 많이 불렀으나 아내는 결코 그의 곁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죽기 2달 전에 부른 노래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는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구구절절 담겨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린다. 그리고 같은 날 부른 “아유 론섬 투나있(Are you lonesome tonight)”도 가슴을 쥐어짠다. 옛날 모습은 간곳없고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고 노래 부르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그가 죽은 후 3명의 의사가 부검했다고 한다. 약물 중독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살이 너무 많이 쪘고 당뇨병에다 혈압이 높아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가수가 되고 부자가 된 후 마련한 그레이스랜드에 있는 자택은 지금도 관광객에게 오픈하고 있다. 그가 출연한 영화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는 아내를 두고 형과 삼각관계가 벌어져 결국 형에게 총을 쏘자 형의 동료가 동생에게 총상을 입혀 결국 죽게 한다는 줄거리다. 이 영화의 주제곡이기도 한 ‘Love Me Tender’도 참 감미로운 노래라 잊을 수가 없다.
 
그가  20세기에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대중문화예술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한다. 그 당시 비틀스(Beatles)가 세계를 휩쓸고 미국에 와서 공연을 수없이 많이 했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의 죽음을 또 한 번 아쉬워하면서….

김수영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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