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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징비록

윤석열 대통령과 징비록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을 발탁해 최전방의 요직을 맡기는가 하면 전쟁이 터지자 영의정과 도체찰사로서 동양3국의 국제전을 잘 이끌어 조선에 승리를 안긴 난세의 정치인이었다. 〈징비록(懲毖錄)〉은 그가 겪은 임진왜란의 기록서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정이 가장 어렵던 5년간 영의정을 지냈다. 이순신이 전선에서 싸운 최고의 장수였다면, 류성룡은 전시 국정을 운영한 최고의 리더였다. 류성룡은 비록 파직됐지만, 전쟁의 뼈아픈 기억을 교훈 삼기 위해 집필을 시작했다. 1598년 관직에서 물러나 경북 안동 하회로 돌아간 류성룡은 전란 중에 겪은 성패의 자취를 곰곰이 반성하고 고찰해, 뒷날의 일에 대비할 수 있도록 〈징비록〉을 썼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당시에 좌의정, 영의정, 사도 도체찰사의 중책을 맡았던 류성룡은 전란이 끝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임진왜란 전란사를 저술하는데, 그것이 바로 〈징비록〉이다.  '징비'란 무엇인가. 지나간 날들을 징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는 뜻이다. <〈징비록〉은 1586년 일본 사신이 우리나라에 다녀간 일을 시작으로 해서 1598년 이순신 장군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소상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일본 전역을 평정하고 66주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 인동(경상북도 칠곡)을 지나던 야스히로가 길가에 도열한 병사들의 창을 보고 비웃는 투로 말했다.  "당신들 창의 자루가 참으로 짧습니다그려." 그는 또 상주 목사 송응형이 베푼 주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랜 세월을 전장에서 보냈기에 이렇게 터럭이 희어졌지만, 귀공께서는 기생들의 노래 속에서 편안하게 세월을 보내는데 어찌 머리가 희어졌소?" 대단한 비아냥이다. 그런데 송응형은 그때 부끄러운 줄이나 알았을까. 그리고 서울에 도착하자 예조판서가 베푼 잔치 자리에서 야스히로는 호초(약재로 쓰이는 후추나무 열매)를 한 주먹 꺼내더니 자리에 뿌렸다. 그러자 기생들과 악사들이 달려들어 호초를 줍느라 잔칫상은 금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야스히로는 크게 질타했다.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머지않았다.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이 모양이니 이러고서 어찌 나라가 온전키를 바라겠느냐." 실로 우리를 뼈저리게 하는 대사들이다.  
1590년 3월, 황윤길을 상사, 김성일을 부사로 삼고 허성을 서장관으로 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사신으로 온 쇼오 요시토시를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1년 봄에 돌아왔는데, 황윤길은 사신 일행이 겪은 내용을 기록한 글을 올리면서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전혀 다른 보고를 올렸다. "신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나이다. 윤길은 공연히 민심을 현혹시키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되자 조정의 의견 또한 둘로 나뉘게 되었다. 서애 류성룡과 김성일은 함께 퇴계의 문하였다. 김성일을 만난 류성룡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그대 의견이 상사와 전혀 다르니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오?" 그러자 김성일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 역시 일본이 절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윤길의 말이 너무도 강경해 잘못하면 나라 안 민심이 동요될까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전, 류성룡이 천거하여 종6품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은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 안에서는  이순신의 갑작스러운 승진을 의심의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서애 류성룡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다. 결국 이순신을 천거해 조선을 구한 이가 바로 류성룡이다. 당시 조정에 있던 무장 가운데는 신립과 이일이 가장 유명했는데, 조정은 1592년 임진년 봄에 신립과 이일을 변방에 파견해 순시토록 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4월 1일,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와 임금께 보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조사해온 내용이란 것은 고작 활과 화살, 창과 칼 같은 무기들의 보유 실태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군이나 읍에는 문서상으로만 무기가 갖추어져 있을 뿐 실제로 필요한 무기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 무렵 집으로 찾아온 신립에게 류성룡이 물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큰 변이 일어날 것 같소. 그렇게 되면 그대가 군사를 맡아야 할 터인데, 그래 적을 충분히 막아낼 자신이 있소?" 신립이 대수럽지 않게 답했다.  "그까짓 것 걱정할 것 없소이다. " 류성룡이 다시 말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과거에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소." 그러나 신립은 끝까지 태연한 말투로 대꾸했다.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 이 무슨 어이없는 대답이란 말인가. 이 같은 안이한 생각이 결국 적을 불러들인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태풍 ‘힌남노’ 대응에서 처음으로 ‘대통령답게’ 움직였다. 국민 고통에 공감했고 민첩했다. 포항 지역 아파트 지하 주차장 인명 피해 현장을 돌아보고 유족을 위로한 후 곧바로 포항과 경주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8월 서울 폭우·침수 사태의 ‘무능과 둔감’ 딱지를 떼기 위한 윤 대통령의 절박한 ‘징비’다.  윤석열 대통령은 태풍 ‘힌남노’ 대응에서 처음으로 ‘대통령답게’ 움직였다. 국민 고통에 공감했고 민첩했다. 포항 지역 아파트 지하 주차장 인명 피해 현장을 돌아보고 유족을 위로한 후 곧바로 포항과 경주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8월 서울 폭우·침수 사태의 ‘무능과 둔감’ 딱지를 떼기 위한 윤 대통령의 절박한 ‘징비’다.  
무한 당쟁에 매몰돼 세계 정세를 외면하다 국망(國亡)에 몰린 비극이 임진왜란이고 6·25 전쟁이다. 한국 좌·우파와 윤석열 정부도 당쟁 정치로 외치의 징비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치명적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미·중 그레이트 게임은 국제연합(UN)에 기초한 세계 거버넌스 체제를 우리 눈앞에서 붕괴시키고 있다. 상호 이익 관계가 얽힌 지구 경제가 전쟁을 막는다는 자유주의적 신념은 망상으로 판명됐다. 지역적 침략전이 준(準)세계 전쟁으로 비화하고 제한 핵전쟁과 자포리자 원전 재앙까지 운위되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생생한 증거다. 수퍼 태풍은 앞으로도 한반도를 강타할 것이다. 세계사적 도전과 민생 문제는 국가 존망을 결정할 정치적 태풍이다. 우리는 폭풍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피눈물로 폭풍에 대비해 생명과 나라를 살릴 순 있다. 제11호 태풍 힌남노는 삶과 죽음의 이치를 입증한 징비의 현장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실사구시 리더십으로 국민 아픔을 덜어주었다. 이젠 대통령이 자신을 버리는 처절한 징비로써 ‘윤석열의 시간’을 증명할 때다. 국난을 함께 넘는 21세기 징비록의 길이 우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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