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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여행자의 과거

미래는 늘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미래를 그럴듯하게 꾸며줄 자원들은 늘 현재, 이 순간에 있기에 현재는 대체로 미래에 저당잡힌다. 또한 우린 마치 ‘역사’가 없는 사람처럼 현재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지만, 기분전환 삼아 떠난 여행은 늘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강력한 촉매가 된다.
 
수년 전 함께 유럽을 여행한 지인은 기차 안에서 초등학생 때 가족이 맞은 불운을 유쾌하게 펼쳐놨다. 힘 있던 가세가 기울자 부모님은 칼국숫집을 열어 아빠는 반죽을 하고, 엄마는 국수를 뽑았다. 그러던 중 어떤 일에 연루돼 엄마는 감옥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엄마는 학생운동 하다 끌려온 여대생들 사이에서 연락책을 맡아 이야기는 마치 활극처럼 흘러갔다. ‘엄마가 감옥에 갔었다.’ 이런 말을 흥미롭게 할 수 있다는 걸 그 여행에서 배웠다.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고교 시절 내가 겪었던 학교폭력이 23년 만에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행은 기억을 끄집어내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한 여행자들은 예상치 못하게 그곳에서 먼 과거와 맞닥뜨린다. 현실에선 앞으로만 걸어나가기에 기억도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지만, 타국에서 들을 준비가 된 귀를 만나면 어두운 터널에 갇혀 있는 몹쓸 과거를 꺼내놓는다. 그런 점에서 모든 여행은 ‘시간여행’이다. 몇 년 전 타이베이를 함께 거닐었던 중년 남자 둘은 여행 말미에 파국으로 치달은 결혼생활을 털어놓았다.
 
8월에 에든버러를 찾은 것은 거기서 파주출판도시가 변모할 방향과 미래를 참조하기 위함이었는데, 우리 일행은 두 도시를 저울질하는 와중에도 내내 과거로 돌아갔다. 누구는 술 좋아했던 아버지 이야기를, 누구는 학창 시절 선생님께 매 맞고 입원한 아픈 이야기를 했고, 그런 와중에 분위기를 지배한 감정 하나는 지나온 시간의 후회였다.
 
K와 M은 동년배에 지방 출신의 공통 정서를 지녔고 사회적 자아가 돋보이는 이들이다. 일이 곧 삶 자체인 것처럼 매달려온 그들은 오십대에 접어들자 본연의 자아를 조금 되찾겠다는 마음을 먹었다(자기 과거에서 스스로 배제돼왔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건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들의 따뜻한 마음씨와 웃음소리, 편한 얼굴이 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겠기에 나는 그들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 삶을 굳이 찾아나서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과거를 털어놓는다. 귀를 연다. 톱니처럼 맞물리는 내 경험을 꺼낸다. 그러다 상대와의 간극을 확인하며 나를 이질적으로 느껴 자기혐오가 조금 깃든다. 상대의 이야기에 계속 귀 기울인다.’ 이건 이번 여행을 하면서 반복된 패턴이었다.
 
“자네의 여행은 항상 과거 속에서 진행되는 것인가?” 이것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쿠빌라이 칸이 사신 마르코 폴로에게 여행 보고를 받으면서 되물었던 질문이다. 마르코는 여느 사신들처럼 이국의 풍물과 제도를 들려주기보다 각 도시에 새겨진 기억들을 가지고 돌아왔고, 바로 그것이 그 도시를 존재시킨다고 보았다. 황제는 처음엔 갖고 온 물건들이 보잘것없다며 마르코의 향수 섞인 발언을 빈정거렸지만, 마침내 담배 연기를 피워올리면서 “불타버린 삶에서 타고 남은 찌꺼기” 같은 것, 과거 현재 미래의 뒤범벅 같은 것이 여행의 유산임을 깨닫는다.
 
그러니 우리의 이번 여행 목적은 미래를 구상하기였는데도 가장 많은 시간과 마음을 쏟은 것은 상대의 기억 들여다보기였다. 또 다른 일행 S는 에든버러를 여러 번 온 적이 있는데, 지금은 시력을 잃어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그가 도시를 마치 자기 동네처럼 걸으며 거기 묻어 있는 냄새, 땟자국, 추억들을 들춰내자 ‘보이지 않는 도시’는 우리 눈앞에서 점점 더 뚜렷한 윤곽을 갖춰갔다. 에든버러는 축제 도시로서 자리매김한 지 75년 됐지만, 그 사회 풍경과 자연 풍경이 우리 과거와 맞물릴 때 도시는 새로운 색채를 얻는 듯했다. 특히 여성 셋이 오로지 몸으로만 대화한 공연 ‘도너츠’는 내가 과거 친구들 사이에서 느꼈던 갈구·갈등·작별을 응축한 것처럼 다가왔고, 나는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잃어버린 관계 몇몇을 떠올리며 내가 가진 과거가 빈약하다는 것도 직시했다.
 
여행자의 눈은 사물과 만난다. 에든버러와 더블린에서 가장 많이 바라본 사물은 현관문이었다. 몇백 년씩 된 그곳의 건물들은 사적 소유물이라 해도 주인이 손대거나 부술 수 없고 변별성이나 장식에의 욕구가 들면 현관문의 재질과 색·모양만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거주자들의 욕망과 기억이 새겨져 있는 현관문을 바라보며 우리는 각자의 기억들을 새겨놓고 그곳을 떠나왔다.

이은혜 /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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