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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그리운 것’은 산 그늘에 묻혀있다

옛날 시골집엘 가면 너른 마당에 ‘바지간지대’라는 게 있었다. 어른 키보다 두서너 뼘 정도 더 높게 서 있는 키다리 나무 장대를 일컫는다. 표준말로는 ‘바지랑대’라고도 하는데, 이놈은 마당 복판에서 안채 처마 밑에서 행랑채 서까래, 혹은 감나무 가지 밑동이 까지 가로질러 다소 느슨하게 잡아맨 긴 빨랫줄을 받치고 있다. 이놈은 빨랫줄의 중간에 비스듬히 제 몸을 기대거나 그 줄을 힘겹게 떠받치며, 허구헌날 마당 창공을 가로지르는 온갖 풍경을 혼자서 멀거니 보고 느끼고 혼자서 건들대는 싱거운 물건이다.  
 
이 키다리 나무 장대는 보통 동네 곳곳에서 흔히 자라던 버드나무를 베어다 만들거나 실한 대나무를 잘라 끝을 살짝 가르고 중간에 짧은 쐐기 막대를 끼워 결 따라 갈라지지 않도록  끈으로 묶어 끝부분을 새총처럼 V자로 남김으로써 빨랫줄에 끼어 걸 수 있게 짝을 맺어주었는데, 아마 유년을 널찍한 마당이 있는 시골집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그때 그 시절 잔바람에도 싱겁게 건들거리던 키다리 ‘바지간지대’의 그 희화적 풍경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수필가는 이 ‘바지간지대’에 관련해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었다.  
 
‘빨랫줄이 한가할 때는 이 녀석도 건들거리며 늘어지게 쉬곤 하지만, 어쩌다 젖은 겨울 빨래라도 가득 널리는 날이면 땀을 줄줄 흘리며 줄을 붙잡고 온종일 서 있어야 한다. 줄과 이루는 각도를 적당히 하면서 빨래가 땅에 닿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 녀석의 소임이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이렇듯 그 훤칠한 키에도 불구하고 바람 따라 다소 건들대긴 하지만, 그래도 혼자서 힘자랑하듯 외다리로 마당을 지그시 밀어 올리고 나서야 겨우 제 몸을 세우는, 그야말로 집안의 돌쇠 머슴처럼 시골엔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했다.  
 


가만 돌이켜보면, 시골 마당의 상징처럼 서 있던 바지간지대... 그게 어디 보통 물건이던가, 나무에 걸려 맥을 못 추던 연을 걷어 살려내고 초가지붕 위에 냉큼 올라앉은 속수무책의 제기를 마당으로 다시 내려오게 하는가 하면, 감나무 끝에 매달린 홍시를 따먹기 위해서는 필수의 무기(?)가 아니었는가. 그야말로 아이들에게는 구세주 같은 물건이었다. 그런가 하면, 바지막대기는 바람이 드세게 부는 날은 똑바로 서 있기보다 옆으로 비스듬히 비켜서는 법을 알고, 꼿꼿하게 서서 모진 바람과 맞서기보다는 바람과 함께 이리저리 흔들리며 고꾸라지지 않는 법을 알던 지혜로운 물건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요즘 세대들은 별 신통한 반응이 없을 것이다. 요즘은 이제 시골에서도 마당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 사선으로 쳐진 논스톱 빨랫줄을 보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빨래를 내다 거는 일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찾아보면 이 물건의 짝이었던 빨랫줄의 흔적은 조금은 남아있다. 가끔 아파트 옥상에는 옹색하지만 빨랫줄이라는 게 있는데... 진화 뒤끝에 생긴 퇴화의 흔적이라 할까, 마치 인간의 퇴화한 꼬리뼈 같아 삐시기 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어느 시인은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고 했다.  
 
"혹 산 뒤에 있는 이런 물건들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오래전부터 서로가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결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여서가 아닐 것이다. '산이 있어 그 산을 오른다'는 말처럼 이미 산자락에 가려져 있는 그리운 것들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그래서인지… 여유 없이 살다보면 어떨 땐 가끔 수평과 수직이 서로 기대어 말없이 떠받드는 옛날 시골 너른 마당의 그 풍경이 떠오른다. 수평을 높여 비스듬히 제 몸을 세우던 ‘바지간지대’의 그 넉넉한 마음이 그립다.  삶이 힘들고 팽팽하여 명치끝이 콕콕 찌를 땐, 느긋한 빈 빨랫줄을 지그시 누르던 그 ‘바지간지대’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산자락에 숨어 있더라도 그런 물건을 함께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혹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손용상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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