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멋진 유언장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신문을 우편으로 받아보곤 했다. 지금은 신문이 집으로 날마다 배달된다. 그 기쁨을 즐기는 사람은 남편이다. 방에서 오전 나절 신문을 독파하는 그이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반면 늙은 노견까지 밥을 챙겨야하는 나는 오전시간이 늘 분주하다. 그래서 남편은 특종기사가 나오면 큰소리로 나를 부르거나 신문을 가져와 나의 코앞에 펼쳐 주기도 한다.오늘은 갑작스런 부음소식에 우리 가족이 잠시 멍해졌다. 수년전 고인이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신 후에는 한 번도 뵙지 못했기 때문이다. 16년 전인가 보다. 한지인의 소개로 그분을 처음 만났다. 잘못되어가는 한인사회를 바로잡기 위하여 잡지를 만들려 하니 도와달라고 청하셨다.
나는 늘 조용히 수필만 쓰던 터이라 금방 대답을 드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한번은 점심을 사주시면서 이민 와 고생했고 한 때는 가발사업으로 성공한 이야기 등을 들려주셨다. 너무 많아 다 기억을 못하겠지만 아무튼 대단한 분임을 느낄 수 있었다. 키는 자그마하고 머리는 염색한 것처럼 새까맣고 정의와 배짱이 두둑한 분, 매운 작은 고추 맛을 느끼게 하던 서울사나이였다.
고인의 개인 사무실이 편집실이었다. 디자이너와 나, 그리고 사장님. 회의하여 내 아이디어로 만든 잡지의 이름이 결정되니 당장 ‘주필’이라고 인쇄된 명암 상자를 만들어 와 내밀며 잘해보자며 부탁했다. 내가 여성이여서인지 그분과 자주 식사를 한 적은 없다. 가끔 조언을 하실 뿐. 디자이너와 나에게 월급을 주셨다. 그리고 한번은 법정에 가자고 하셨다. 내 생애에 처음 가보는 법정은 한 여류인사가 한인사회의 부조리 선거와 공금에 대한 것들을 고소한 사건이었다. 고인의 말대로 당시 고발당한 여러 한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돈과 명예가 걸리면 이런 수치스러운 일들이 한인사회에 유행병처럼 만연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거주하던 곳은 한인 인구도 2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고인은 경복고와 연대 상대를 나온 인재였고 오래전 한인 회장이었다. 지금처럼 공탁금 없이 추대를 통해 한인회장으로 봉사하던 좋은 시절이었다. 그는 잘못된 한인회에 퍽 분노하고 있었다. 1963년 도미하여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분으로 당차고 지도력이 뛰어난 분이었느니 당연했다.
골프로 사람들과 사교했다. 주변엔 형님이라고 따르는 분들이 많았다. 늘 지갑을 열어 술 한 잔하며 후배들에게 식사를 사주던 분이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함께 어울려 한인사회를 걱정하던 분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먼저 떠나버렸으니 그간 얼마나 허무했을까.
은퇴마을 라구나우즈로 이사를 간 후엔 암 진단을 받았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한동안 다시 건강해지셨다는 전화로 목소리를 듣고 나도 안심했는데, 요 몇 해 내가 무심해버린 사이에 그분의 부음소식이 왔다.
다음은 그분이 차분하게 생전에 준비해둔 고별인사이다.
“사랑하는 선후배 그리고 친지 분들께, 장기간 투병하면서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근 60여 년간의 미국 생활에서 저를 아껴 주시고 격려를 해주신 지인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저에게는 엄청난 인연과 과분한 행운이었습니다. 특히나 여러분과의 사회활동은 큼 기쁨이었습니다. 이제 돌아갈 날을 앞두고 저의 운명에 장례식은 간략하게 가족장으로 할 것으로 유언했습니다. 어려운 이시기에 저의 죽음이 여러분께 도리어 불편함을 끼칠까 우려됩니다. 여러분과 가족이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재덕 올림-
가족이 낸 광고 속에서 한참 패기 있던 모습의 그분 사진을 본다. ‘운명 전에 준비하셨다’는 광고 글귀를 읽는 동안 행복했던 추억에 잠기지만 눈물이 흐른다.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처럼 황소고집이던 고인은 신념을 가진 일에는 언제나 당당하게 말하며 살았던 분이었다.
흔하지 않는 그분의 멋진 고별인사가 나의 심금을 울렸다.
최미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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