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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이민 선조들의 ‘아리랑 드레스’

삶의 세 가지 기본 요소를 흔히들 ‘의식주’라고 부른다. ‘입는 옷(衣), 먹는 음식(食), 사는 집(住)’의 순서는 사람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옷을 꼽는다. 마찬가지로 곤궁한 상태를 표현할 때도 ‘굶주리고 헐벗다’가 아니라 ‘헐벗고 굶주리다’로 표현한다. 안 입고는 살아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을 텐데도 옷 입는 것을 중시하게 된 것은 예의와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문화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전쟁이 막 끝난 1950년대의 한국은 먹고 사는 문제로 급급했다. 예쁘고 멋진 옷을 입는 것은 상상도 못 할 때였다.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로 꼽히는 노라 노는 미국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귀국했을 때 “우리나라의 한 사람당 국민총소득이 겨우 87달러, ‘몸빼’바지가 생활복인 현실”이었다고 회상했다.  
 
패션이라는 말조차 낯설었던 시절에 미스코리아 오현주양이 1959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아리랑 드레스’란 애칭을 얻은 양단 드레스로 의상상을 탔다. 노라 노가 디자인한 ‘아리랑 드레스’는 그 이름처럼 한복의 치마저고리 유형을 서양의 드레스와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옷이었다. ‘아리랑 드레스’는 이후 해외에 나간 여성들이 즐겨 입는 옷이 되어 세계 곳곳에 한국 의상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아리랑 드레스’는 국가 등록문화재 제613호로 등재되어 한국현대의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통 복식과 서구 복식의 절충 또는 융합을 시도한 ‘아리랑 드레스’는 당시 멋쟁이들의 옷으로 유행했을 뿐 아니라 결혼식에서는 웨딩드레스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얼마 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리랑 드레스’를 직접 만났다. 순백색의 ‘아리랑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신부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신부의 다소곳한 모습을 바라보는 신랑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신랑과 신부는 결혼 60주년을 맞아 리마인드 웨딩을 올리는 부부였다. 60여년 전, 유학생으로 미국에 온 두 사람은 교회에서 케이크와 음료수만 차려놓고 조촐한 결혼 예식을 올렸다. 유일한 사치였다면 한국에서 보내온 ‘아리랑 드레스’를 입는 것이었다.  
 
20대의 꿈 많은 청춘이었던 신랑과 신부는 6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며 80대의 중후한 모습으로 변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미국 생활의 불확실함 속에 시작한 결혼 생활은 안정과 평안이라는 꽃을 피웠고, 자녀와 손주들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리마인드 웨딩을 주례하면서 ‘계속해서’라는 말이 맴돌았다. 60년 전 결혼식을 올리며 맺었던 약속이 계속해서 이어졌음에 감사했다. 60년간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이어온 결혼 생활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삶의 고비마다 두 사람이 함께 견뎌왔던 인내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기를 간구했다.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구부러진 어깨를 펴고 늠름하게 선 신랑과 60년간 깊숙이 간직했던 ‘아리랑 드레스’를 꺼내입은 신부가 두 손을 맞잡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모습에서 이민 생활이라는 거친 세파를 이긴 개선장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두 사람뿐 아니라 이민자로 사는 우리의 인생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그때 가졌던 꿈과 함께 말이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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