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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비엔나 소시지의 추억

추억은 그립다. 지나간 것들은 물안개 속 피어오르는 풍경처럼 아름답다. 찌들고 가난했던 시절도 아련한 향기로 다가온다. 쭈글쭈글한 양은냄비에 라면 한 봉지 끓여먹던 그 행복했던 시절. 비엔나 소시지 한 깡통 넣어 먹는 날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특식 먹으며 큰 횡재를 만난 것처럼 가슴이 벅차 올랐다. 이젠 고급 식당에서 소문난 셰프가 만들어 주는 요리를 먹어도 감격하지 않는다. 그때 그 시절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소세지 든 라면의 달달하고 짜릿한 냄새처럼 가슴을 따스하게 하지 않는다.
 
추억은 흘러간 시간의 되새김질이 아니라 가슴으로 새기는 삶의 무늬다. 빛바랜 일기장 속에 적어둔 사랑의 고백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반짝인다. 추억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실핏줄 속에 흐르는 흔적이다.
 
나는 아직도 마트에 가면 작은 깡통에 든 비엔나 소시지를 산다. 다행히 포장도 안 바뀌고 예전 그 모양대로다. 두 개를 사면서 빛 바랜 초등학교 사진 속에 해맑게 웃는 단발머리 소녀 얼굴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 짓는다.
 
푸드스타일리스트 요리 달인인 딸은 촌스러운 내 취향에 깔깔대지만 그 작은 깡통 속에는 내 행복했던 시절의 빛나는 증거물이 차곡하게 들어있다.  
 


세상에서 처음 접했던 핑크빛의 미국 소시지 맛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경이로웠다. 미국 군인과 결혼한 친척 집에서 처음 먹었던 말랑말랑하고 신기한 그 맛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아련한 동경으로 떠오른다. 가정교사 월급 받는 날에는 대구교동 양키시장으로 달려가 소시지와 교수들이 좋아하는 미제 커피를 샀다. 양키시장은 미군부대가 주둔한 도시에서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품들을 주로 팔았는데 이방의 거리처럼 신비로웠다.  
 
전쟁의 상흔이 지나간 그 곳은 만물상회의 풍요로움과 정상적인 유통과정에서 구하기 어려운 밀수품이 난무했다. 추잉껌, 시바스, 코냑, 말보로, 바셀린로션, 아스피린, 초콜릿, 비스킷, 레브론 샴푸…. 동동구리무 대신 미제 크림과 코티분도 있었다. 수시로 나타나는 단속반을 신출귀몰하게 피해 도깨비시장이라 불렀다. 미국 물건은 냄새부터 달랐다. 미국은 멀리 있지 않았다. 따뜻하게 입고, 달콤하게 먹고, 촉촉하게 바르고, 짜릿하게 유혹하는 냄새 나는 물건들이 있는 곳이 우리가 아는 미국이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금순이를 목 놓아 찾던 사람은 부산 국제시장 아니라 대구 교동 장사치로 전해진다. 1952년 여름, 가수 현인과 오리엔트레코드 사장 이병주, 작곡가 박시춘 등이 대구 양키시장 옆 교동 강산면옥에서 냉면을 먹은 후 거리에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고향 가면 익숙하던 그 길에서 나는 방황한다. 지금은 몸 하나 누일 공간밖에 안 되는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점방들이 벌집처럼 촘촘히 박혀있는 시장통은 썰렁하다. 과거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추억은 떠올리며 가슴 설레는 것. 되돌아서면 흩어진 파편들이 여기저기 뒹굴 뿐이다. 이름만 부르면 금방이라도 달려올 것 같은 얼굴들이 안개꽃처럼 흔들린다. 세월은 가고 사람도 사라지고 먼지만 뒹굴어도 추억이 있기에 남은 날들이 외롭지 않다.

이기희 / Q7 파인아트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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