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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은퇴를 생각할 나이

‘엄마가 심심하다며 또 미국을 다녀와야겠다고 하셔. 심지어 뉴욕이랑 볼티모어 비행기 표만 끊어주면 혼자서 손녀들을 만나고 LA 언니 집으로 가겠다고. 엄마 연세에 비행기 자주 타는 것도 나쁘니 조금이라도 더 붙들고 있어 볼게.’ 서울 여동생이 카톡을 보냈다. 올해 87세인 엄마는 치매 아버지를 돌보며 2년여를 집에 갇혀 지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간의 감옥살이를 보상 받기라도 하듯 8개월 동안 미국에 두 차례 오셨다. 한 번은 내 이사를 도우러 LA에, 또 한 번은 연구원으로 볼티모어에 살게 된 딸의 정착을 돕기 위해 여동생을 따라 워싱턴DC에 오셨다.  
 
연로한 엄마와 언제 또 장거리 여행을 하겠나 싶어 나도 합류했다. 뉴욕 사는 내 딸도 휴가를 얻으니 엄마, 두 딸, 손녀 3대의 여행이 됐다. 볼티모어, 워싱턴DC, 필라델피아, 뉴욕을 방문했다. “나는 차에서 기다릴 테니 너희들끼리 보고 와라. 오래 못 걸어.” 엄마는 항상 건강하고 안 늙을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다.
 
바쁜 이민 생활을 꾸리느라 변변한 여가활동이나 제대로 된 장거리 여행은 생략하고 살았다. 남편은 이민 가장의 책임감으로 자기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 ‘세계 테마기행’ 등의 여행 관련 영상을 보면 충분하다며 아이들과 나만 외국 여행을 가게 했다. 이제 이민생활도 안정되어 가족여행을 하고 싶지만 성인이 된 아이들은 부모와의 여행은 원하지 않는다. 인생은 이렇듯 엇박자이다.
 
코로나로 가게의 몇몇 손님이 사망하고 친정아버지를 포함 가까운 집안 어른 몇 분이 근래 돌아가셨다. 인생 한 번 즐겨보지도 못하고 세월 다 가는 건 아닌가, 겁이 덜컥 났다. ‘다리 떨리기 전, 가슴 떨릴 때 여행을 떠나라’라는 여행사 광고문구가 가슴에 와 닿는다.
 
갱년기를 맞아 말이 많아지는 남편과 가능한 말을 안 섞으려 하지만 여행 계획을 짤 때는 소풍 전날 어린애들처럼 의기투합하니 우습다. 은퇴하고 부부만 홀가분하게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하자며 유튜브와 블로그를 찾아본다. 여러 나라를 짧고 분주하게 관광하기보다는 한 곳에 한 달간 머물면서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꿈도 꾼다.
 
가게를 닫는 일요일이면 은퇴를 미리 연습하는 기분으로 산으로 들로 나갈 계획을 짠다. ‘오늘은 문화지수를 높여볼까’하며 게티센터를 찾았다. 다양한 미술 작품 외에도 탁 트인 전망과 아름다운 정원은 하루 나들이 코스로 부족함이 없다. 코로나로 예약된 손님만 받아 붐비지 않는 미술관에서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싱그러운 나무 그늘 밑에 자리한 가든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곁들여 커피를 마시니 누구도 부럽지 않은 순간이다.
 
정원을 산책하다가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소그룹이라 옆에 가서 설명을 들었다. 마침 도슨트가 한국분이라 반가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증명하듯 그녀의 설명을 들으니 게티에 여러 번 왔지만 건물과 정원이 새롭다. 투어가 끝나고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20여년을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고 게티에서 도슨트로 일한 지 30년이 됐다 한다. 인생 2모작을 멋지게 사는 ‘지혜롭게 나이 드는 여성’ ‘닮고 싶은 여성’이다. 내가 속한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흥미 있는 분야를 공부해 뜻깊은 봉사활동을 하는 분을 만나니, 은퇴해서 여행 다닐 생각만 했던 내가 부끄럽다. 내가 흥미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은 무엇이 있을까.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최숙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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