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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봄날, 고양이의 눈빛

완연한 봄이다. 도시 암자에서 맞이하는 몇 번째 봄이던가? 화려한 도시의 봄도 계절의 무상을 느끼기는 매일반이다.  
 
내일(8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다. 절에선 여러 가지 준비로 부산하다. 부처님 가르침대로라면 더 열심히 정진해야 할 테지만 온전한 수행자의 모습은 간 데 없고, 3년 만에 치러질 행사 준비에만 온통 신경이 가 있다.  
 
그래서인가? 봄이 오면 이상의 소설 ‘봉별기’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스물세 살이요- 삼월이요- 각혈이다”라던. 괜히 잘 알지도 못하는 20세기 초의 유치한 분위기에 잠겨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곤 한다.  
 
누가 말했던가? “변화무쌍하여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오뉴월의 구름이요, 둘째는 고양이 눈, 그리고 세 번째는 여자의 마음”이라고.
 


언젠가부터 까만색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이따금 내가 사는 암자를 들락거렸다. 허락도 없이 나지막한 벽을 타고 넘어와 눈치를 보며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조그만 툇마루에서 제집인 양 늘어지게 졸곤 했다. 이 녀석은 빨리 달리는 법도 없지만, 한편 항상 조심스럽게 굴었다. 무료하여 조는 듯해도 가느다랗게 반개한 눈에는 긴장을 감추고 있다. 길고양이라 그런지 사회생활을 거부하고, 저 혼자 치열하게 생존의 노력을 하는 듯했다.
 
마음에 거리를 두고 ‘도시의 외로운 사냥꾼’을 가끔씩 지켜보다가, 추운 겨울나기가 저나 나나 힘들지 싶어 사료를 사서 먹였다. 공양 시간 맞추어 나타나는 저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하기는 할까? 근데 뭔가 응시하는 듯한 저 눈! 꺼림칙하다. 겨우 밥을 주며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표정도 눈빛도 보이기 시작했다.
 
장자의 ‘추수편’ 이야기 잠깐! 장자와 혜자가 호수의 다리에서 거닐다가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나와서 한가로이 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물고기의 즐거움일세.” 이에 혜자가 대꾸하기를 “자네는 물고기도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겠는가?” 다시 장자가 반박하기를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사람과 동물이 서로 심리적 교감을 할 수 있을까? 언어학자에 의하면 사람의 생각은 언어로 한다는데, 저 고양이에게는 언어도 없는데 어떻게 저런 눈빛을 할 수 있지? 꼭 뭔가 사색하는 것처럼. 하긴 강아지나 송아지의 눈도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다만 알 수 없을 뿐이다. 장자에 의하면, 사람도 서로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니 말이다.
 
불교의 한 학파에서는 “모든 존재는 물질, 마음, 개념, 유형, 무형 등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고, 그 다섯 가지 유형에 속하는 세부 존재들은 총 100가지가 있으며, 이를 오위백법(五位百法)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마음’이 67개다. 전체 100가지 중 3분의 2가 넘는다. 그만큼 마음에 대한 탐구가 많다는 뜻이다. 과연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부름 직하다.
 
그런데 불교가 말하는 67개의 마음으로 변화무쌍한 봄날과 고양이 눈빛을 포착할 수 있을까?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 내 마음을 알 수 있을까? 물도 흘러가고 배도 흘러가는데, 배에서 빠뜨린 칼을 뱃전에 그은 표식으로 찾을 수 있을까?
 
불교는 모든 것을 회의적 눈으로 살피면서 무상과 무아라는 ‘자유와 외로움의 세계’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따뜻한 자비를 행하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따져 이해되는 범주 내에서만 살 수는 없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잠시라도 타인의 보살핌과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니, 사람들은 평생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게 마련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서로 도와야 할 이유가 될 터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저 고양이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나, 많은 시간을 자력으로 살아가는 듯하다. 밥을 찾긴 해도 일견 힘 있어 보이는 인간에게조차 비굴한 표정으로 호의를 구하지 않는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고양이 특유의 삶의 태도인가보다.
 
하지만 이따금 남의 호의는 대범하게 수용하면서, 남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는 고양이의 삶이 왠지 차고 쓸쓸해 보인다. 봄날 절집 툇마루 한쪽에서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를 보니, 무심한 듯 냉정한 눈을 가진 고양이의 외로움이 안쓰럽다. 하지만 나는 모른다. 저 고양이가 정말로 외로워하는지.

원영스님 / 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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