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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 작전과 ICBM

흥남 철수 작전과 ICBM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유엔군과 국군은 북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11월 압록강에 다다랐을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급전직하로 반전되었다. 장진호 주변에 포진한 미해병 1사단은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다. 미해병 1사단을 포위한 중공군 제 9병단은 12만 명으로 병력면에서 미군의 10배에 가까웠다. 여기에 낮에는 영하 20도, 밤이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지는 개마고원의 혹한은 미 해병대원들을 더욱 괴롭혔다. 더군다나 1950년 겨울은 50년만의 혹한이었다. 전투로 인한 사상자보다 동상 환자가 더 많았다. 박격포 포판은 딱딱해진 땅으로 인한 반동 탓에 자주 깨졌다.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는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수많은 전사자가 나왔지만, 해병대원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의연했다. “해병대가 후퇴하는 것이냐”라는 종군기자의 질문에 “후퇴라니.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쏘아붙였다.  
 
11월30일 오후부터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와 함께 몰아친 눈보라는 밤이 되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면 1만 명의 해병은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물밀 듯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과 또 다른 복병 동장군 앞에서 퇴각을 명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사령부는 장진호에서 철수해 흥남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전부대원에게 날씨가 개이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고 외쳤다. 훗날 리차드 케리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날 밤은 섭씨 영하 30도로 엄청난 강추위가 몰아쳤고 눈보라로 전투기 공격작전이 어려웠다. 전 해병대원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눈보라가 그치고 날씨가 맑아지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얼마 안 돼 거짓말처럼 하늘이 열리며 큰 별이 빛나는 게 아닌가. 도저히 포위망을 뚫을 수 없을 것 같았을 때, 갑자기 눈보라가 멈추고 하늘이 열렸다. 그리고 영롱한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12월 11일 미해병 1사단은 악전고투 끝에 함흥에 도착했다.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벌어진 보름 동안의 전투에서 미해병대는 전사상자 3,637명, 비전투사상자 3,657명을 기록했다. 비전투사상자 대부분은 동상 환자였다. 중공군이 입은 피해는 더 막대했다. 중공군 전사자는 25,000명, 부상자는 12,500명에 달해 9병단은 아예 작전능력을 상실했다. 무엇보다 미해병대가 얼어붙은 장진호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이 국군과 유엔군 주력부대는 무사히 함흥에 집결할 수 있었고, 해상 철수에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때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가려는 피난민들이 흥남 부두로 밀어닥쳤다. 그러나 미군에는 이들을 태울 군함이 없었다. 미군은 빅토리호의 레너드 러루 선장에게 피란민들을 화물칸에 태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러루 선장은 즉각 군사 장비를 부두에 되 부리고 피난민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흥남 부두에 남은 마지막 배였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선원 47명을 태운 화물선이었다. 승객은 12명까지 태울 수 있었고 적재량은 1만658톤이었다. 1950년 12월 빅토리호가 전투기 연료를 비롯한 보급품을 싣고 흥남에 도착했을 때, 미군은 장진호에서 극심한 추위와 싸우며 중공군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미군은 10만 병력을 흥남에서 배편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빅토리 호의 임무는 미군 전차와 트럭을 비롯한 군사 장비 철수였다.
 
승객 정원 12명이었던 빅토리 호에 피난민이 1만4000여명이 탔다. 화물칸을 다 채우고 갑판도 가득 메웠다. 상선이었던 그 배엔 어뢰 탐지기도 없었고 함포도 없었다. 무기라곤 러루 선장이 허리에 찬 권총 한 자루가 전부였다. 일반 화물 운반용으로 제조된 빅토리’호에는 선원이 머무르는 12인용 선실밖에 없었다. 배 한쪽에 3층으로 된 화물선창이 있는데 아래쪽 선창에 피란민을 수용한 다음, 숨 쉴 공간만 남겨놓고 선창을 칸막이로 막고 그 위에 또 태웠다. 또 제일 아래쪽 선창 꼭대기와 갑판 사이에 선창을 임시로 만들어 그 곳에도 사람들을 짐 부리듯 싣고 승강구의 뒤끝은 출입과 환기를 위해 그대로 놔두었다. 갑판 아래의 공간이란 공간은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뒤늦게 들어온 사람은 버스나 지하철에서처럼 내내 서있어야 했다. 선창을 채우자 갑판 사이도 채우고 주 갑판과 보트 계류장까지도 모자라 삭구(배에서 쓰는 밧줄 종류)에 매달리기까지 했다. 일등항해사 러니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피난민들을 하역용 팔레트에 태우고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배 밑바닥부터 채우기 시작했다. 화물칸은 모두 세 층이었는데, 맨 밑바닥을 채우면 그 위를 강철 덮개로 덮고 또 화물을 채웠다. 그러나 사람을 실었기 때문에 덮개를 약간 열어뒀다. 그래야 빛과 공기가 통하니까. 화물칸엔 난방도 전기도 물도 음식도 없었고 기온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졌다.”
 
피난민 승선이 완료되자 갑판까지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배 창고 아래에 있는 폭발성이 강한 300톤의 항공유와 1만 4000여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빅토리 호는 23일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다음날 새벽이 되었을 때,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온통 얼어붙은 송장이 되어 갑판을 뒤덮을까 걱정했는데 피난민들은 모질게도 질긴 생명줄을 붙들고 있었다. 12월 24일 부산항에 닻을 내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부산은 이미 유엔군과 백만 명 이상의 피난민들로 북적이고 있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으니 남서쪽 80km 더 가서 거제도에서 하선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러루 선장은 우선 체력의 한계에 도달한 피난민들을 위해 10번 계류장에 정착하고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부상자들은 부산항에 내려 치료를 받고 음식과 물, 담요 등을 배에 실어 나누어 주었다. 24일 자정에 시작된 피난민들의 식사는 다음날인 25일 아침 7시가 다되어야 겨우 끝났다. 그날 밤에 마침내 거제도에 도착했지만 항구가 비좁아 공해상에서 다시 하룻밤을 보내고 26일 아침에 지원받은 미군 8,500톤급 상륙정 2척에 태워 하선시켰다. 비로소 피난민 철수작전은 끝난 것이다. 항해 중에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그로부터 7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 흥남철수작전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일등항해사로 수많은 피난민의 탈출을 도왔던 로버트  러니 제독이 지난 3월 10일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죽음은 다시 한 번 전쟁의 아픈 기억을 되살려준다. 그때 12살이던 소년은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한반도에서 포성은 멎었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북한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미 본토도 사정권에 들어간다고 한다. 임기 말까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매달린 문재인 보란 듯 레드 라인’을 넘어선 것이다. 이를 보도한 신문의 헤드라인은 의미심장하다.“북한은 문재인의 평화 노력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북한이ICBM을 발사한 것은 명백한 모라토리엄(핵실험과 ICBM 발사 유예) 파기인 동시에 문재인 정부가 집권 5년 내내 공들여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파산을 의미한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모라토리엄 준수를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로 해석하며 미국에 대북 대화 재개와 제재 완화를 촉구하는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이 같은 북한 도발에 대해 “강력 규탄한다”고 한 말이  왠지 낯설기만 하다. 그동안 북의 잇따른 도발에도 도발, 규탄이라는 말도 못 하더니 이제야 ‘규탄’이라는 말이 생각났나. 문 대통령은 과거엔 못 본 척하던 ‘서해 수호의 날’에 “강한 안보를 통한 평화야말로 서해 영웅들에게 보답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했다. 이 말을 그가 했다고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는 재임 중 한·미 연합 훈련을 없앤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김정은의 가짜 비핵화가 드러난 이후 미국은 훈련 재개를 원했지만 문 정권은 반대했다. 적이 싫어한다고 군사 훈련 하지 말자는 나라가 된 것이다.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 러시아에 짓밟히는 우크라이나를 보라. "주여  대한민국을 지켜주소서."
 

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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