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꽃길 가듯 나비처럼 가볍게
‘의식의 흐름에 따른 서술을 통해 등장 인물들의 내면과 몽타주 같은 기억의 각인을 묘사하는 기법으로 페미니즘과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불리며 20세기 주요 작가로 평가 받는다. ‘자기만의 방’(1929)에서 ‘우리가 모두 일 년에 500파운드를 벌고 자기 방을 갖는다면’이라는 유명한 구절은 어째서 여성이 작가가 되기 어려운지를 사회적, 역사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정신건강의 악화로 괴로워했던 울프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런던을 떠나 교외 강 근처로 거처를 옮겼는데 평소 앓던 신경증이 악화돼 1941년 봄, 우즈 강가로 산책을 나갔던 그녀는 다시는 돌아 오지 않았다. “여보, 내가 다시 미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또다시 그런 지독한 시간을 극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다시 건강해지지 않을 것 같아요. (중략) 누군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당신일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호의에 대한 확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이 나를 떠났습니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아요’라는 작별의 글을 남편에게 남긴다.
이별도 연습이 필요하다. 죽음은 이승에서 누리는 이별의 마지막 축제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작별이다. 악착같이 삶에 매달리지 않으면 죽음을 애달파하지도 않을 것이다. 죽음은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원형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지 않고는 죽음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없다.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다. 오복의 마지막은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이다. 슬프지 않는 죽음이 있을까만은 가장 억울한 것은 ‘제명대로 못 살고 원통하게 죽는 것’이다. 일찍 죽는 것(夭死), 객지에서 죽는 것(客死), 횡액으로 죽는 것(橫死), 원통하게 죽는 것(寃死), 분하게 죽는 것(憤死),은 모두 억울한 죽음이다. 하늘에서 받은 수명대로 오래 살다가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자리에 누워 죽는 것(臥席終身)이 가장 좋은 죽음이다.
어머니는 갑자기 죽으면 애들이 놀랄 테니 감기 몸살 든 것처럼 몇 주 아프다가 자식들에게 작별 인사하고 죽게 해달라고 매일 엎드려 기도하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요즘 주변에 병마와 투병하는 사람이 많아 마음이 심란하다. 젊고 건강해도 언제 마지막 종이 울릴 지 모른다.
나이 들면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죽기 위해 산다. 건강식 먹고 운동하는 건 자식이나 가족, 친구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잘 죽기 위해서다. 집착을 버리고 생의 매듭을 풀면 편하게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변호사 만나 유언장과 ‘존엄사 희망 유언장(living Will)’ 업데이트 할 생각을 한다. ‘Living Will’은 본인이 직접 결정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위독한 상태가 되었을 때 존엄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뜻을 밝힌 유언이다. 모든 것 버리고 떠나는 그 날 위해, 꽃길 가듯 나비처럼 가볍게 떠날 준비를 하면 죽음도 사는 것처럼 견딜 수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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