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평화는 가라
김건흡 칼럼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공격에 우크라이나는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그대로 당했다. 우크라이나는 8년 전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빼앗기고도 ‘평화 호소’ 뿐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못했다. 1994년 러시아·미국·영국이 안보를 보장한다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크림반도 침탈 뒤 맺은 정전협정은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힘을 키우지 않고 동맹도 없는 나라의 운명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다루는 방식은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놓고 영국·프랑스 동맹과 대결하던 나치 독일의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지금의 푸틴과 마찬가지로 히틀러 역시 강대국의 지위를 잃고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과거의 영광을 재연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웃에 새로 생긴 나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졸지에 소수민족이 돼 핍박받는 처지가 됐다고 주장하는 동포들이 도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 이웃 나라가 침략을 당하더라도 영국이나 프랑스가 전쟁까지 각오하고 지키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933년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국내에서 독재 체제를 확립해 가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질서를 정한 베르사유 체제에 본격적으로 사나운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증유의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처음에는 은밀히, 나중에는 대놓고 군비를 증강해 종전협약을 어겨도 저지하지 못했다. 1936년 3월 독일군이 비무장지대로 규정된 라인란트에 진군해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는 2년 뒤에는 같은 독일어권이지만 엄연히 주권국가였던 오스트리아에 군대를 보내 강제 병합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이번에도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주요국에서는 말뿐인 항의 이외에 별다른 대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38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 침략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을 때 영국·프랑스 동맹은 다시 한 번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히틀러가 내세운 구실은 독일과 인접한 주데텐란트 지역의 독일계 주민들이 체코슬로바키아 정권에 핍박받고 있으니 이를 응징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독일 신문들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자행된 독일인 '학살' 뉴스로 도배되고 있던 그해 9월 초 히틀러는 군사훈련을 핑계로 75만 대군을 체코슬로바키아 접경지대에 투입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 군사동맹인 프랑스의 참전은 불가피해지고 프랑스의 동맹인 영국도 가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쟁을 막기 위해 히틀러와 협상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이는 체임벌린 당시 영국 총리였다. 체임벌린의 생각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국토 일부를 떼어 주고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자는 것이었다. 더구나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만 손에 넣는다면 다시는 영토에 욕심을 내지 않겠다고 공언한 터였다. 히틀러가 제시한 '최후통첩' 시한이 임박해 전쟁의 위기감이 절정에 달했던 1938년 9월 27일 체임벌린은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머나먼 나라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벌이는 다툼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서 참호를 파고 방독면을 써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기이하며 믿기 힘든 일입니까." 참고로 런던에서 '머나먼 나라'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까지 직선거리는 1천32㎞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주선으로 1938년 9월 29일 독일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을 결정짓는 회담이 열렸다. 참석자는 히틀러, 무솔리니, 체임벌린과 프랑스 총리 달라디에였다.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예정일을 하루 앞둔 9월 30일 새벽 이들이 서명한 뮌헨협정에 따라 결국 주데텐란트는 독일에 병합됐다. 당사자이면서도 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이 협상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홀로 나치 독일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체임벌린은 환호하는 군중에 둘러싸여 여유 있게 말했다.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평안히 주무십시오.”그러나 뮌헨협정 체결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평화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영토에 욕심내지 않겠다"던 공언과 달리 히틀러는 곧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땅마저 집어삼켰고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전면 침공을 개시함으로써 제2차 대전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나라도 힘이 있어야 지켜진다는 것이고, 더불어 동맹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일깨워준다. 우크라이나가 강력한 국방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러시아가 감히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우크라이나는 과거에 엄청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핵보유국이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핵무기를 러시아에 반납을 했고, 그 후 우크라이나의 정치 지도자들은 스스로 국방력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강대국들끼리 맺은 알량한 각서가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보장해 줄 것이라 믿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토라는 동맹국 가입을 친 러시아대통령이 발로 차버렸다. 그러니 지금의 비극을 겪으면서도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이것이 냉혹한 국제정세의 현실이니 말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기 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한 나라였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시진핑이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중국만 그러한가. 북한은 또 어떤가. 우크라이나 다음은 대만, 남중국해 등 아시아가 긴장의 무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여러 군데서 나온다. 당연히 여기에는 한반도도 포함된다.
전쟁은 평화를 외치는 자에게 먼저 찾아온다. 평화는 힘으로 대비하는 사람들에게 깃든다. 그런데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는 “흉악한 사드 대신 보일러를 놔 드리겠다”고 했다. 사드는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에서 우리를 지킬 최후의 방어 수단이다. 어떻게 이것을 ‘흉악하다’고 하나. 이 후보는 북핵 발사 임박 때 선제 타격한다는 작전 계획에 대해서도 ‘전쟁광’이라고 비난한다. 북핵이 날아와도 그냥 손 놓고 있어야 하나. 우크라이나처럼 북한 집단에 평화를 호소해 국민 생명을 지킬 건가. 문재인 정부는 5년 내내 평화를 외치며 ‘종전 선언’에 목을 맸다. 북 미사일 도발과 핵 위협엔 눈을 감았다. 북한이 우리 미사일 방어 체계를 무력화하는 극초음속 미사일을 쐈을 때 문 대통령은 남북철도 착공식에서 “평화”만 말했다. 종전 선언 얘기도 되풀이했다.
북한은 이제 대구경 방사포와 이스칸데르, SLBM, 극초음속 미사일에 이어 전술핵과 핵추진 잠수함까지 개발하고 있다. 이 정권은 선거 때마다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단편적인 이분법 선전으로 유권자들의 불안을 자극해 득을 보았다.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힘을 기르고 준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에 양보하는 것이다. 이 정권의 ‘전쟁이냐, 평화냐’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으니 양보하자’는 것이다. 양보 다음엔 굴복이고, 굴복 다음엔 우크라이나 처지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고도 좌파 정권은 평화’ 타령이다. 대한민국이 침공당하면 ‘종이 선언’흔들 텐가. 이번 사태에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전쟁은 이기더라도 공멸한다. 평화가 경제이고 밥”이라며 “대화로 평화적 해결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국제 사회는 전쟁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러시아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 후보는 우크라이나의 대화 노력, 평화 호소가 부족해서 전쟁이 났다고 생각하나. 힘없는 평화는 나라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강력한 힘과 안보가 뒷받침되지 않은 평화는 모래성과 같다. 한미동맹은 대한민국 힘의 원천이다.
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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