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자몽 주스와 약 복용
약과 음식의 상호작용은 대개 부정적이다. 자몽 주스가 대표적이다. 알약 하나를 자몽 주스와 함께 삼키면 두 알 또는 세 알을 복용할 때만큼 효과가 커질 수 있다. 라디오에서 여기까지 설명했는데 사회자가 의외의 질문을 했다. “약을 한 알 먹었는데 두세 알 효과가 난다면 좋은 거 아닌가요?”그럴 수 있다. 고가의 항암제를 복용해야 하는 환자가 적은 양의 약으로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약값을 절약할 수 있다. 2012년 시카고대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항암 치료에도 사용되는 면역억제제 시롤리무스를 자몽주스와 함께 투여할 경우 약물 혈중 농도가 거의 350%까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알로 4.5알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적은 양으로 효과를 보면서 장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은 줄일 수 있으니 장점이 될 수 있다.
자몽 주스를 약효 증강을 위해 실제로 이용하긴 어렵다. 제품마다 성분 함량에 차이가 있다. 그러니 정확히 얼마만큼 마셔야 하느냐 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약의 상호작용을 역으로 이용하여 적은 양의 약으로 효과를 높이는 방법은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 코로나19 먹는 치료약 팍스로비드의 경우가 그렇다. 팍스로비드는 주된 약효를 내는 약(니마트렐비르)과 주성분이 적은 양으로도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약(리토나비르)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성분 알약 2알에 보조성분 알약 1알을 함께 복용한다. 보조성분이 하는 일은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는 게 아니다. 주성분이 인체 내 대사효소에 의해 청소되는 것을 막아 주는 역할이다.
자몽 주스로 인한 상호작용은 1989년 캐나다의 과학자들이 알코올과 혈압약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됐다. 참가자가 술맛을 느끼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자몽주스를 써서 맛을 가렸더니 도리어 자몽 주스에 혈압약의 혈중 농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단 걸 알게 된 것이다.
후속 연구를 통해 왜 이런 상호작용이 생기는지도 밝혀졌다. 사람의 장세포에는 약물을 대사하는 효소(CYP 3A4)가 있는데 자몽 주스 속 플라보노이드가 이 효소를 억제하기 때문이다. 모든 약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효소로 대사되는 약이 시판 의약품의 30~50%에 달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약국에서 약사가 자몽주스를 함께 마시면 안 된다고 설명할 때는 잘 기억해두는 게 좋다.
자몽주스와 약의 상호작용처럼 때로는 우연이 중요한 발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는 편견을 버린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긍정과 부정 양쪽을 다 살필 수 있어야 약의 상호작용을 역이용한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나는 넓고 유연하게 세상을 바라보는가. 스스로 질문해봐야겠다.
정재훈 / 약사·푸드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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