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친구
“만나서 얘기하면마음이 가벼워지고
새로운 용기가 생긴다
이런 친구가 있기에
미국에 늦게나마
이민 결정을 쉽게 했다”
나에겐 절친이 많지는 않아도 손가락으로 셀 정도는 된다. 그들은 각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마음이 유난히 후덕한 친구, 불평이나 판단을 전혀 안 하는 친구, 그리고 평생을 장애우와 함께하는 믿음이 좋은 친구 등이다.
며칠 전에 마음이 후덕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께 송금을 하려는데 은행에 다닌 우리 딸에게 방법을 물어봐 달라고 했다. 매사에 능통한 친구가 어지간히 피곤한가 보다 싶어 마침 한국에 있는 내 돈을 송금해 주기로 했다. 나이 들어 용돈으로 쓰려고 조금씩 넣었던 국민연금 2년치였다. 요즘 환율이 올라서 내려가기만 기다리고 묶어 두었던 돈이다. 항상 신세만 져온 친구인지라 높은 환율도 문제가 안 되었다.
며칠 후에 우리는 중간에서 만나 보낸 돈을 건네 받았다. 그런데 100불을 더 넣었다고 하였다. 코로나로 만나서 밥도 못 먹은 지도 오래되니 배달시켜 남편과 둘이서 식사라도 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양해도 막무가내였다. 나는 모처럼 친구에게 도움을 주려 했는데 친구의 후덕함에 또 밀리고 말았다.
우리는 여고 동창이다. 대학을 가면서 다른 친구들과는 뿔뿔이 헤어졌는데 이 친구와 나는 학교는 같지 않았지만 같은 지역이라 주말이면 곧잘 만났다. 친구도 나도 모두 자취를 했는데 친구 부모님은 도시에 집을 사서 일하는 사람까지 두면서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다. 나는 점심 저녁 두 개의 도시락을 싸야 하는 의대 다니는 오빠와 여고생 동생과 방을 얻어 자취를 했다.
그러니까 친구 집에 가면 너무 좋았다. 일을 해 주는 언니가 반찬도 잘하고 가지 수도 많아 교자상이 가득했다. 거기다가 친구 고향이 영광이어서 부엌에는 볏짚으로 엮은 영광 굴비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꼬들꼬들한 굴비를 구워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그 뒤론 그렇게 맛있는 굴비를 먹어본 적이 없다. 친구는 동생들이 다섯이나 되었는데 내가 가면 모두가 반가워했다. 친구와 연년생인 남동생은 여자처럼 예쁘게 생겼는데 항상 친구와 같이 나를 골목 끝까지 배웅해 주며 또 오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친구뿐만 아니라 온 식구가 편안하고 후덕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 남동생은 의대 학장까지 지냈다고 들었다.
친구는 70년대 중반에 LA로 이민을 왔다. 떠나기 전에 우리는 동대문 시장에 갔다. 딸 옷을 사면서 우리 두 딸 것도 사주었다. 바나나를 듬뿍 사가지고 같이 우리 집에 들러 애들에게 실컷 먹으라고 했다. 그때 우리는 공무원 월급을 받으며 남편이 박사 과정을 밟느라 바나나는 소풍 갈 때나 한 개씩 넣어주는 귀한 과일이었다. 그러면서 “너는 돈도 없으면서 애는 셋이나 나서 키우냐?”고 했다. 악의가 없이 나를 진정으로 생각해주는 말이기에 나 역시 “그러게”하며 둘이서 웃고 말았다. 친구는 그때 딸 하나였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친구의 솔직하고 담백함이 항상 좋았다. 나는 친구와 달리 누구에게나 듣기 좋게 포장해서 말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 동생은 나를 이중 성격자라고도 얘기한다고 들었다. 친구의 짤막한 표현에 나의 모든 상황이 다 들어 맞지는 않지만 복잡한 내 마음이 깨끗이 청소가 된 기분이다.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친구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우리 집에서 만날 때도 알뜰하게 장보기도 해오고 설거지도 거침없이 한다. 그리고 낙천적이다. 친구의 생활 지침은 오늘 하루 잘 살면 된다라고 한다. 내일 일을 앞당겨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매사에 심플하고 만나서 얘기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새로운 용기가 생긴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이민 와서 이날까지 약사 생활을 하며 주위의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이런 친구가 있기에 나도 자식들이 있는 미국에 늦게나마 이민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자랄 때 친구의 정의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 시대의 전래 동화였을 것이다. 허구한 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아들을 보고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이 어떤 친구들과 노나 싶어 아버지 친구와 누가 더 참 친구인가 내기를 하자고 했다. 돼지를 잡아 자루에 넣어 아들 어깨에 메어주며 친구를 불러 ‘내가 사람을 죽였는데 숨겨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아들 친구는 대문을 닫아버렸다. 아버지 친구 집에 찾아가 아버지도 친구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아버지 친구는 어서 들어오게나 하며 부랴부랴 대문을 열어주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나는 친구 사귀는데 신중을 기했다. 그리고 친구들 좋은 점을 부모 형제들에게도 널리 알렸다. 다 지난 일이지만 아버지는 오빠의 배우자도 내 친구 중에서 고르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 잘 되면 좋아하고 축하해 주고 어려울 때는 진심 어린 충고를 한다.
이런 친구인데 이제는 만나면 피곤하고 힘들다고 한다. 이젠 쉴 때도 되었다고 말하는 나에게 친구는 두 달 쉬어보니 너무 심심했다고 한다. 팬데믹으로 맘대로 누구를 만날 수 없으니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오래 묵은 장맛 같은 우리의 우정을 위해서라도 만남을 가로막는 코로나 팬데믹과 어서 빨리 굿바이 하고 싶다.
이영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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