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노후의 복병’ 인플레이션
“그게 언제 가격인 줄 알아요?” 내가 물건 가격을 보고 놀라면 아내가 하는 답이다. 가만 보면 물가는 고혈압을 닮았다. 평소 가격 상승을 느끼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혈압처럼 인플레이션을 ‘침묵의 암살자’라 부르는 이유다.인플레이션은 높든 낮든 오래 지속할 경우 구매력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2% 인플레이션이라면 별것 아니라 생각할 것이다. 100개 살 수 있던 물건을 5년이 지나도 90개는 살 수 있다. 하지만 20년 지나면 67개밖에 사지 못하며 30년 후에는 55개만 살 수 있다. 인플레이션이 5%라도 되면 돈의 가치는 30년 후에 지금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인플레이션은 노후에 특히 위험한 ‘노후’의 암살자라는 점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노후에 직면하는 인플레이션은 우리가 보는 소비자물가지수(CPI)를 기준으로 한 인플레이션보다 높을 수 있다. 노후에는 젊을 때와 지출 구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령자는 냉장고·자동차 같은 내구재 지출보다 여가·보건·의료 같은 서비스 지출이 많다. 그런데 물가 구성 항목 중 내구재 제품 가격보다 서비스 가격이 더 오르기 때문에 물가 부담이 크다.
특히 고령으로 갈수록 지출에서 의료비 비중이 높아지는데 의료 서비스 가격은 장기적으로는 많이 오르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경우 62세 이상 고령자들의 지출 항목을 중심으로 물가를 계산한 CPI-E(elderly)는 구성항목 중 의료비 비중이 11%로 CPI에서의 5% 비중보다 많다. 이러다 보니, CPI-E가 CPI 상승률보다 연 0.4%포인트 정도 높다.
인플레이션의 위협이 더 큰데도 노후에는 인플레이션을 방어할 수단이 별로 없다. 젊을 때는 근로소득이 있고 그 일부를 투자해 투자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통상 임금은 매년 물가상승률을 감안해 인상되기에 근로소득은 물가에 연동되어 오르는 경향이 있다. 주식 같은 투자자산 역시 장기적으로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가치가 오른다. 기업은 실물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젊을 때는 상대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덜 걱정해도 되는 이유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정반대 입장에 놓인다. 근로소득이 거의 없고 보유하고 있는 금융자산도 주식 같은 투자자산보다는 채권·예금 같은 안전자산이다. 그러다 보니 물가가 상승한다고 해서 소득이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보유 자산의 가치가 따라 오르는 것도 아니다. 요즘처럼 물가상승률보다 예금 금리가 낮은 경우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금융자산의 구매력이 떨어진다.
이처럼 노후에 맞이하게 되는 인플레이션은 높든 낮든 본질적인 위험을 갖고 있다. 특히 장수사회에서는 노후 기간이 길어지므로 파괴력은 커진다. 혹 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높아지기라도 한다면 중대한 위협이 된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우선 일반 소비자물가보다 높게 물가 상승률을 상정해 대비한다. 2%가 일반 소비자물가상승률이라면 노후에 직면하는 물가상승률은 4~5%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보유한 금융자산의 수익률 목표를 너무 안정적으로 잡으면 안 된다. 적어도 물가상승률 이상은 돼야 한다. 이를 위해 부동산·주식·물가연동채권 같은 자산을 보유하고, 물가상승도 따라가지 못하는 자산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 원리금을 보장하는 자산은 단기적으로 안전해 보이지만 시간을 거듭할수록 실질 가치가 떨어지므로 구매력 측면에서 안전한 자산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의료비 상승에 대비해 제약·바이오·헬스케어·요양 관련 부문의 주식을 보유하는 것도 방법이다. 제약회사가 수명 연장의 신약을 개발했다면 내 수명도 더 늘어나게 되지만, 이들 기업의 주가가 상승하면서 보유 자산의 가치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개구리에게 따뜻한 물은 오히려 위험하다. 물이 뜨거워져도 뛰쳐나오지 않고 그 안에 안주하다가 죽기 때문이다. 장수 사회는 낮은 인플레이션도 치명적이 될 수 있다. ‘침묵의 암살자’에게 나의 평안한 노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금융자산을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한다. 무엇보다 안전자산은 원금을 잃지 않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실질 가치를 잃지 않는 자산임을 명심하자.
김경록 /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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