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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냉장고의 사연

 그것은 지난여름부터 말썽의 징후를 보였다. 물방울이 송송 맺혔고, 바닥에 물을 흘렸다. 평소 32~33도였던 것이 50도로 올라갔다. 전문가를 불렀더니 모터가 늙었다고 한다. 새 모터로 바꾸라는 희망적인 의견을 주었다. 의사가 다녀간 후에 멀쩡해지는 아이처럼, 냉장고의 온도는 저절로 내려갔다. 냉동 회사에서도 연락이 없기에, 다시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내 손을 타면서, 뭐, 나와라, 뚝딱! 하면, 가족의 미각을 맞추던, 마술사 같은 존재였다.
 
우편물을 꺼내오는 것은 남편의 일이다. 병원, 은행, 보험 등등, 배심원 하라는 반갑지 않은 통지도 가끔 온다. 어느 오후, 남편이 우편물을 훑어보더니, 봉투 두 개를 급히 연다. 타운에서 보낸 등기물이다. 뒤뜰의 죽은 나무를 자르라는 것과 집 앞의 아스팔트를 고치라는 내용이다. 죽은 나무에서 가지가 떨어지면, 자기 강아지가 맞을 수도 있다고 뒷집이 신고했단다. 또 하나 우편물은 집 앞, 사이드 워크(sidewalk)가 패여서 통행자들에게 불편을 주니, 고치라는 내용이다. 타운홀에 소환될 수도 있다는 은근한 협박 문구도 있다. 남편은 갑자기 분주해졌다. 사람을 불러서 견적을 내고, 유튜브를 뒤지면서 며칠 동안 열심히 공부한다.  
 
겨울이 되었다. 기온이 내려갔으니 냉장고가 편안해질 것이라고 여겼다. 내 예상을 빗나갔다. 다시 50도로 올라갔지만, 냉장고 내부는 서늘했고, 음식들은 멀쩡했다. 여름에 병났을 때도 저절로 나았으니, 이번에도 잠시 그러다 말리라 여겼다. 50도에서 살짝살짝 숨을 쉬는 상태가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 컨테이너를 열고 음식의 냄새를 확인했다. 케일 샐러드는 짓물렀고, 비지찌개는 조짐이 좋지 않다. 끈적거리는 진을 내 뿜는 음식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것은 20년 동안 단순한 냉장고가 아니고 마음을 나누어 가진 존재였다. 병이 난 지난여름부터 하루에 몇 번씩 냉장고 옆을 맴돌았다. 온도를 확인했고, 물방울이 생기면 닦아내고, 바닥에 수건을 깔아서 흘리는 물을 받아냈다. 고약한 냄새를 풍긴 후에야 알아차리다니. 쓸데없는 감정 소비를 반년이나 했다. 대책 없는 긍정이 얼마나 문제인가. 새 냉장고를 주문했다.  
 


한갓 기계에 휘둘려 미적거릴 일은 아니었다. 사람도 사귀다 보면 조짐을 보이는 징후들이 일어난다. 억지로 같이 갈려고 할 때 넘어지고 코가 깨진다. 마음은 쉽게 변하는 것이기에, 예로부터 수많은 언약과 맹세와 혈서가 등장했던 것 아닐까. 매년 다시 살아나서, 항상 사는 줄 알았던 나무도 뒤틀어졌다. 밑둥치에 벌레들이 온상을 만들었으니, 나무가 썩을 만도 했다. 썩은 나무가 잘려나가니, 하늘이 보이면서 공간이 탁 트였다.
 
남편은 길에 쪼그리고 앉아서 아스팔트를 바른다. 어른이 흙장난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동네 꼬마들이 몰려와서 뭐하냐고 묻는다. 메꾼 아스팔트는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다.

김미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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