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맛과 멋] 모과 향기처럼
며칠 전, 영선 씨가 모과를 가져왔다. 로사 씨의 주말 하우스는 남부 뉴저지에 있는데, 그곳에 영선 씨는 여러 가지 과일나무를 심었다.영선 씨와 문기 씨 내외는 내가 일이 있을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특별한 친구들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그날도 원래는 점심 약속을 했었는데, 내가 몸이 좋지 않아 나가지 못하겠다고 했더니 문기 씨가 설렁탕 사서 모과랑 갖다 주자고 했다고 한다. 마침 영선 씨가 스파게티를 만들어서 이왕이면 홈메이드 스파게티가 나을 것 같아 따끈따끈한 스파게티 소스와 국수, 모과 한 보따리에 커다란 배 두 개를 얹어서 배달해준 것이다. 방금 만든 스파게티는 훌륭한 점심이 되었다.
모과(木瓜)는 유자와 함께 가을의 전령 중 하나이다. 한국에 살 때는 가을이면 유자와 모과를 사서 꿀에 재어 겨울 채비를 하는 게 일이었다. 중국이 원산지인 모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조선 시대 이전이라고 추측한다. 모과는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못생긴 모양 때문에 천대받는 과일이다. 모과를 두고 사람들은 세 번 놀란다고 한다. 첫 번째는 너무 못생겨서, 두 번째는 향기가 그윽하고 좋아서, 세 번째는 맛이 시고 떫어서. 그런데 네 번째, 모과가 한약재로 유용하며 또 나무줄기가 단단하고 매끄러운 데다 다루기가 쉬워서 가구의 목재로 많이 쓰였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모과의 약효 또한 감기 예방이나 가래 제거, 기침을 멎게 해서 한방에서는 감기와 기관지염, 폐렴을 치료하는 데 사용하고, 구토나 설사, 이질에도 효과가 뛰어나다니, 생긴 것과 달리 쓰임새가 다양하다.
특히 모과는 썩어서도 그 향이 그대로라고 한다. 그래서 변치 않는 사랑의 표징이 되기도 한다. 모과의 사랑 전설은 고전인 시경(詩經)에도 나온다.
나에게 모과를 던져 오기에/ 어여쁜 패옥으로 갚아 주었지/ 꼭이 보답하고자 하기보다는/ 길이 사이좋게 지내보자고
그 시대 여자들은 수줍어서 직접 고백 대신 과일을 던져 사모하는 마음을 표시했고, 과일을 받은 남정네는 여인에게 보석으로 화답했다고 한다. 그 대목엔 모과뿐만 아니라 복숭아와 오얏도 나오는데, 썩어도 향기가 좋은 모과는 변치 않는 사랑에선 어느 과일도 이길 수 없는 고수일 것이다.
영선 씨가 준 모과를 깨끗이 썰어 꿀에 재어 담으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이가 든 게 참 좋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 육체적으로 쇠진하는 건 사실이나 그보다는 나이 들어변한 내가 좋은 거다. 젊었을 때는 살면서 기쁜 일, 안타까운 일, 억장이 무너지는 일들로 고달팠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그런 모든 일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냥 흘러간다. 이제는 사람의 속이 보이고, 사람의 소중함이 속속들이 느껴져서 더 깊은 정을 주게 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집착이 없으니 구속도 없는 자유로움이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들어준다.
나도 어릴 때는 모과꽃처럼 작고 예뻤겠지. 자라서는 세파에 시달려 울퉁불퉁, 세월의 상처가 얼마나 많았을까. 비록 뒤뚱거리는 인생이었겠으나 그래도 말년엔 모과처럼 은은하게 향기를 내뿜는 ‘나’, 썩어서도 향내 나는 그런 ‘나’가 되면 괜찮은 인생이지 않을까. 영선 씨 덕에 모과차를 만들면서 또 한 수 배운다.
이영주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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