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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마당] 경허 선사의 가르침

한국 근현대 불교에서 큰 스님이었던 경허 선사는 30대 때 “중이 중노릇 잘 못해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돼야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 말이 바로 ‘무비공(無鼻孔)’이라는 유명한 화두가 됐다. 즉 콧구멍이 없어 멍에를 맬 수 없는 소가 되라는 뜻이다.  
 
일본 강점기 국민의 고통이 심할 때 경허는 만행에 나섰다. 하루는 날이 저물고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하룻밤 신세를 질 처소를 찾았다.  
 
그런데 주인 여자 말이 동네에 괴질이 돌아 사체가 쌓여 있어 방을 줄 수가 없다고 했다. 당시 의료시설이 열악했던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호열자로 불리는 콜레라였다. 당시 콜레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30만 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처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경허는 갈 곳을 잃어 큰 나무 아래 비를 피하고 밤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보냈다. 이 시간이 그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만행을 중단한 그는 승가로 돌아와 100일 정진 끝에 앞서 말한 이 화두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됐다.  
 
천지가 괴질로 신음하는데 아무리 목탁을 치고 불경을 외쳐도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경허는 환속했다. 불교 교리가 인간들의 마음을 교화시킬 수는 있지만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는 괴리감에 불가를 떠났다.  
 
이름을 박난주로 바꾸고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훈육하면서 지내다가 64세로 열반했다.  
 
그는 교리에 얽매인 불교인들에게 ‘무비공’이라는 화두로 숙제를 남기고 떠났다. 당대 최고의 승려 중 한 명이었지만 종교라는 테두리에 머물지 않고 완전한 자유인으로 종교를 믿으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조선 불교의 거목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선각자인 경허 선사의 가르침은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이산하·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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