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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간이역의 추억

 11월은 간이역 같은 달이다. 가을과 겨울 그 어디쯤 엉거주춤한 계절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이 오기 전 여유롭고 한가한, 기억 속 추억을 꺼내보기 좋은 달이다.  
 
간이역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소박한 건물,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벤치와 텅 빈 철길, 붉은 맨드라미와 선로 옆 코스모스가 무리지어 흔들리는 모습이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추억 하나쯤은 꼭 있어야만 할 것 같은 풍경이다.
 
내가 기억하는 간이역은 40여년 전 신촌역이다. 이화여대에서 신촌 로터리 쪽으로 내려오면 큰길에서 한 골목 들어간 곳에 다소곳이 숨어 있다. 신촌역을 지나는 경의선은 서울역에서 문산까지 가는 기차였다. 대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신촌역에서 기차를 타고 백마역까지 가곤했다.  
 
지금은 백마역 주변이 온통 카페 촌이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천막을 친 몇 곳에서 막걸리나 동동주를 팔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논 한 가운데 낮은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곳이 일산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백마역에 내려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면 천막으로 지어진 ‘화사랑’이라는 막걸리 집이 나온다. 우리는 옹기종기 둘러 앉아 막걸리와 파전을 먹으며 문학을 얘기하고 어설픈 철학을 논하며 열을 올리기도 했다.  
 
비 오는 날은 화롯불을 놓아주었다. 화롯불에 비치는 얼굴이 막걸리 탓인지 불빛 탓인지 벌겋게 취해갔다. 서로의 목소리가 턱없이 높아질 때 어둑어둑한 길을 더듬어 나왔다.
 
요즈음은 백마역이 지하철로 연결되는 모양이다. 일산이 대 도시가 되었으니 이제 다시 가면 어디쯤인지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추억을 찾아 나섰다가 기억조차 잊어버리기 십상일 터이다.  
 
간이역 시간은 세상과 다르게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보따리를 들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떠들썩한 소리는 사라지고 대합실 빈 의자와 빛바랜 깃발만이 펄럭인다.  
 
어느 한적한 간이역 길게 뻗은 기찻길을 따라 걷고 싶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길을 느릿느릿 걸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엔 선로에 깔린 돌들을 발로 툭툭 차며 불안과 염려와 조바심 같은 것들을 멀리 보내 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산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종착역을 향해 걷는 긴 여행길이다. 그 길을 따라 우리는 한적한 간이역을 지나가는 것이다. 스쳐 지나기도 때로 멈추기도 한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간이역에 내려 잠시 쉬어가면 어떨까. 잊었거나 잃어버린 것들을 꺼내어 보고 버려야 할 것이 있으면 슬그머니 내려놓을 수도 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에 잠시 머물러 본다. 그것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무심하고 밋밋한 11월이 가고 있다. 그리움이 밀려온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그리움, 잊고 산 것에 대한, 다시 돌아가지 못할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오래된 추억 속 한 점, 빛나던 시절의 내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다.

박연실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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