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서] 미시시피 바닷가에서
영 그레이 / 수필가
내가 미시시피의 해변도시 빌록시와 인연을 맺은 햇수는 벌써 43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 있는 공군훈련소에서 기초훈련을 마치고 버스로 빌록시에 있는 키슬러 공군부대로 행정교육훈련을 받으러 간 훈련병이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숙소를 배정받은 후 바로 부대 정문에서 불과 한 블럭 거리인 해변으로 동료들과 우루루 몰려 나갔다. 생전 처음 바다를 본 동료는 환성을 질렀고 모두 그동안 훈련 받느라 시달렸던 스트레스를 바닷바람에 날려보냈다.
행정교육은 새벽에 시작해서 정오가 되면 끝났다. 그러면 오후는 완전히 자유였다. 점심을 먹고 7월 한여름의 태양이 뜨겁게 이글거리던 바닷가로 나가서 오후를 보냈다. 해변을 걷다 지치면 모래사장에 누웠다. 그당시 그곳은 한적한 시골 바닷가 마을이었다. 온갖 잡생각 모두 파도소리에 섞다가 잠이 들어 전신에 화상을 입고 고생해도 여전히 바닷가로 나갔다. 모든 것이 낯선 부대안 숙소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그리고 90번 해변 도로변에 죽 늘어선 고옥의 아름다운 정경에 반했었다. 고옥을 지키던 구불구불 휘어진 떡갈나무들과 사귀며 여유를 찾았고 군인생활에 적응해갔다.
훗날 내가 앨라배마주의 멕스웰 공군부대로 발령받아 몽고메리로 왔고 이어서 텍사스에 살던 동생이 빌록시로 이사했다. 더구나 빌록시에서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면서 모든 명절이나 긴 휴일은 불과 240 마일 거리인 동생네를 가서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어머니와 해변가를 걸으며 아름다운 고옥을 즐기고 바다를 보며 긴 대화를 나눈 시간들은 성장기에 전혀 가지지 못했던 기회여서 많은 과거사와 어머니를 알게됐다.
한동안 미시시피 바닷가를 찾을 적마다 바다는 변함이 없지만 어머니는 계시지 않고 태풍 카타리나로 고옥들도 사라진 썰렁한 해변을 배회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편안하게 바다와 마주보고 앉았다. 바다는 여전히 멀리서 실어온 많은 스토리를 들려주고 고옥의 빈터에 들어선 산뜻한 집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왕 과거로의 여행을 하니 처음부터 하자고 키슬러 공군부대로 갔다. 부대안을 다니며 예전에 묵었던 숙소와 다녔던 교회, 그리고 교육을 받았던 건물을 찾아봤다. 세월의 흐름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를 긴장시켰던 교육장소들은 그대로 있는데 함께 교육을 받고 전 세계 공군기지로 발령을 받고 헤어졌던 동료들의 얼굴은 흐릿하고 그들과 보낸 추억은 그저 내 것으로 남았다.
빌록시에 머무는 동안 매일 해변을 걷고 갈매기 노는 옆에서 햇살에 은빛 물살로 출렁이는 바다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동생집에서 가져온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를 읽고 또 읽었다. 신에게 바치는 송가 라는 기탄잘리의 신선하고 멋진 시 중에 특히 ‘기탄잘리 1’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멋지게 어울렸다.
‘당신은 나를 무한케 하셨으니 그것은 당신의 기쁨입니다. 이 연약한 그릇을 당신은 비우고 또 비우시고 끊임없이 이 그릇을 싱싱한 생명으로 채우십니다. 이 가냘픈 갈대 피리를 당신은 언덕과 골짜기 넘어 지니고 다니셨고 이 피리로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부르십니다. 당신 손길의 끝없는 토닥거림에 내 가냘픈 가슴은 한없는 즐거움에 젖고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발합니다. 당신의 무궁한 선물은 이처럼 작은 내 손으로만 옵니다. 세월은 흐르고 당신은 여전히 채우시고 그러나 여전히 채울 자리는 남아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을 해변가에서 타고르를 재발견한 사건은 대단한 기쁨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나 혼자의 관념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은 나의 어리석음이었다. 수 많은 성인 현자들이 내 의식에 손을 주고 있었다. 나를 행복하게 해준 타고르의 깊은 영적 통찰에 감탄하며 나 만의 스토리가 아닌 사람살이의 스토리에 나를 접목시키는데 골프치는 사이에 나 혼자 몰래 떠났다고 삐친 집에 있는 남편의 얼굴이 끼어들었다.
영 그레이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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