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서] 멋진 가을 나들이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비행기를 탔다. 작년 3월 이후로 코로나바이러스에 발목이 잡혀 있다가 이제 슬슬 기동하자고 나선 나들이에서 나는 동부의 대도시와 내가 사는 남부의 환경이 다름을 따갑게 느낀 동시에 많은 문화행사를 즐겼다.나 사는 곳의 환경은 요즈음 어디를 가나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고급 레스토랑의 직원들조차 마스크 없이 손님을 맞이하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그곳에서 밥 먹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워싱턴 DC 방문 중에는 늘 마스크를 썼다. 야외에서는 괜찮으리라 싶었지만, 남들이 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니 미안해서 우리도 동조했다.
그동안 변화가 있었다. 우리가 즐겨 다녔던 아이리시 식당이 문을 닫았고 맛있는 빵을 구워주던 제과점도 사라져서 안타까웠다. 아침을 자주 먹었던 한 호텔의 식당은 저녁에만 손님을 받았다. 식당의 테이블들이 보도로 확장된 야외에서 옥토버 페스트 독일 음식을 먹으며 마스크를 쓰고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잊었다.
몇 년의 보수공사 후에 마침내 문을 연 마틴 루서 킹 목사 기념도서관의 그랜드 오프닝 행사에서 넓은 도서관의 내부와 장서에 놀라고 20 언어 통역 서비스도 제공하는 사실에 놀랐다. 도서관의 4층 옥상에 근사하게 마련된 정원에서 바람에 흔들리던 갈대 옆에서 가을 정취를 한껏 맛보며 바로 맞은편 초상화 미술관과 가까이 있는 국회의사당을 봤다. DC 중심가 도서관은 진실로 도시의 심장이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과 미술관을 어슬렁거리는 재미는 예전과 같았다. 방문객이 적으니 특별전이 별로 없어도 볼거리는 많았다. 특히 1920년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수정헌법 19조가 비준된 100주년을 기념해서 여성작가 24명을 소개한 전시회는 그 자체가 화끈한 스토리였다.
그리고 중국계 화가 흉부류(Hung Liu:1948-2021)의 'Portraits of Promised Lands'에는 파란만장한 그녀의 사연이 많은 얼굴로 솔직했는데 그중에 일본군이 찍은 한인 위안부 여성들의 사진을 보고 충동 받아 그린 그림 앞에서 한동안 멈췄다. 내 동족 어린 여자들이 불안에 휩싸여 절망한 표정에는 체념과 분노가 굳어 있었고 뒤의 강렬한 핏빛 배경은 그녀들이 흘린 피눈물 같았다. 그리고 처연한 나비들을 보며 돌아서 등을 보인 여자의 용기는 무언의 항거였다.
9월 마지막 주말에 메릴랜드 르네상스 페스티벌에서 보낸 하루는 진실로 환상의 날이었다. 1977년부터 해마다 열리는데 올해는 8월 28일부터 10월 24일까지 주말에 열린다. 입구인 성문을 들어서는 순간, 21세기에서 16세기 과거로 돌아가서 모두 동화의 마을에 들어선 아이들처럼 흥분했다. 27에이커의 숲속에 1534년 영국 옥스퍼드 주에 있는 'Revel Grove'라는 가상의 마을 환경을 설정해 놓아서 영국풍 문화 운동 분위기가 강했다.
재미난 사실은 이 축제에 온 많은 손님이 중세 의복을 입고 왔고 더러는 입구에서 의상을 빌려 입었다. 각양각색의 모습과 장식을 구경하는 재미가 대단했다. 특히 배역을 맡은 직원들의 복장은 머리에서 발까지 완벽해서 좋은 눈요기였다. 그들에 섞인 나도 마치 무대에 선 배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럽풍 아기자기한 멋진 건물들 사이로 여기저기 볼거리와 먹거리가 많아서 남녀노소 누구나 행복했다.
헨리 8세를 만난 어린 손자는 기사 작위를 받고 좋아서 먹칼과 방패를 구해서 다른 어린 기사들과 해적선에 올라 신나게 놀았다. 술집을 다니며 흥이 난 어른들도 음악인들을 찾아 무대를 옮겨 다니다 장인들의 시범을 보고 광대놀이와 셰익스피어 연극을 슬쩍 보다가 재미난 놀이에 모두 빠졌다. 숲속에 번지는 백파이프의 선율에 흥이 났던 온 가족은 마상 경기장을 둘러싼 3,000좌석을 꽉 채운 관객들 사이에 끼여서 검술 시범과 4기사들이 벌린 마상 시합과 전차 경기를 보며 요란한 고함과 웃음소리에 시간을 잊었다.
10월 첫 토요일,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의 작은 지역 델 레이에서 열린 다문화 예술과 음악 페스티벌은 중심가 10 블록 양쪽에 빼곡히 들어선 텐트마다 반짝이던 수제 창작품 축제였다. 인산인해로 복잡했지만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서로서로 보호했다. 화사하고 밝은 남부와 조금 다른 분위기로 동북부 예술인들의 창작품은 날렵하고 깔끔한 푸른 인상을 줬다.
풍성한 문화행사와 건전한 환경을 즐긴 멋진 가을 나들이의 추억은 이제 내 가슴에 남았다.
영 그레이 / 수필가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