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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전 통금시절 개식용, 이젠 끝내야 할 때

아버지는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했다. 딸은 어린 시절 그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한국을 경험했다.   국제 동물보호단체 휴메인 소사이어티 인터내셔널(이하 HSI)의 앨리슨 코코란의 이야기다. 그는 CIA 한국지부장(73~75년), 주한미국대사(89~93년)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의 딸이다. HSI에서 최고마케팅담당자(CMO)로 활동 중이다.   현재 보스턴에 사는 코코란 CMO는 이번 달 한국을 방문한다. 지난해 할리우드에서 개최됐던 개농장 구출견 초상 사진 전시회(5월28~6월1일)가 한국에서도 열리기 때문이다. 〈본지 5월 4일 자 A-3면〉 아버지는 외교관, 딸은 동물 애호가로 한국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1970년대 한국에서 살던 당시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던 걸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본지는 지난해 개 식용에 대한 국제적 혐오감과 한국 개농장에서 구출된 개들의 입양 과정 등을 담은 기획 시리즈인 ‘개 식용 종식, 1인치 남았다’를 보도한 바 있다. 구출 견 초상 사진 전시회와 맞물려코코란 CMO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개 식용 종식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이유를 물었다.   -한국에 대한 기억은.   “우리 가족이 한국에 처음 살았을 때가 1970년대였다. 그때 우리 가족은 검은색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함께 데리고 왔는데 통금 시간이 있었던 게 생각난다. 동물은 매번 그렇게 각 나라의 기억과 함께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버지 때문에 미얀마에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 어머니가 집에 염소를 데리고 왔다. 여러 나라에 살면서 각기 다른 문화에서 동물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동물과 문화의 연결점은.   “동물과 동물의 서식지 등은 인간의 활동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동물이 잔인한 대우, 방치, 고통 혹은 보살핌, 동정 등을 받는 것은 대부분 사람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있다. 따라서 동물 보호를 추구하려는 인식은 우리 사회 속에서 스스로 보호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친절, 책임 의식과도 밀접하게 연결돼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늘 불우하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존재를 돌봐야 한다고 배웠다. 동물도 내가 돌봐야 할 범주에 속한다.”   -구체적인 예가 있다면.   “모피를 위해 1억 마리의 동물이 사육되고 포획된다. 멸종 위기종이 암거래 시장에서 팔린다. 공장식 축산도 문제다. 동물과 생물의 다양성 손실도 심각하다. 오늘날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개 식용 문제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동물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가할 수 있지만, 동시에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해결책도 인간에게 있다. 내가 HSI에서 일하게 된 이유다.”     -개 식용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나는 한국에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 직접 그곳에 살기도 했고, 매우 아름다운 나라다. 나는 동물, 특히 개를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살았던 1970년대 한국에서는 개고기가 매우 흔한 음식이었다. 그때부터 관심이 있었다. 이후 아버지가 대사가 되면서 1990년대 다시 한국에서 살게 됐다. 당시에도 70년대에 비해 개 식용을 지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낮아졌음을 느꼈다. 그후 30년이 지난 이제 한국에서는 개 식용 종식 여론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게 됐다. 전시회 이후 다시 한국에 가게 된다면 개 식용 종식을 축하하기 위한 방문이 됐으면 한다.”   -찬반 논란은 여전하다.   “지금 한국의 케이팝, 영화, 예술, 각종 브랜드 등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매우 멋진 일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국가인 만큼 개고기 식용 문제에 대해서도 조명을 받고 있다. 실제 한국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 한국인이 대다수다. 특히 젊은 층은 개 식용을 반대한다. 개고기에 대한 수요는 거의 없는데 고통의 규모, 이미지 훼손 등을 고려하면 개 식용은 이제 불필요하지 않나.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보면 개 식용을 끝내기 위해 사회적,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한국 국회에서 금지 법안이 발의됐다.   “퍼스트레이디인 김건희 여사가 개 식용 종식에 대한 열망을 재차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여야가 초당적으로 개 식용 금지 법안에 지지를 표명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제는 잔혹한 산업을 근절하기 위해 중요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다.”   -전시회를 통한 메시지는.   “개고기 산업에서는 개를 멍청하고 영혼이 없는 존재로 본다. 잘못된 생각이다. 소피 거먼드 작가의 개초상 사진전은 그 메시지를 전달한다. 개고기 농장에서 죽을 뻔한 사연을 가진 개들이 인간의 사랑과 유대감 속에 동반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를 사진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개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다. 동물도 한 생명으로서 특별하다는 것을 일깨워 줄 것이다.” 장열 기자ㆍjang.yeol@koreadaily.com앨리슨 코코란 국제 동물보호단체 앨리슨 코코란 한국 현대사

2023-05-21

[김형석의 100년 산책] 격동의 한국 현대사, 왜 내 꿈에 미리 나타났을까

나는 비교적 꿈을 많이 꾸는 셈이다. 생리적 반응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꿈.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꿈은 인간의 잠재의식이 시간제한을 받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나는 삶의 격동기를 치르면서 어떤 영감(靈感)으로서의 꿈도 경험해 온 것 같다. 25세 때, 해방과 더불어 15~16년 동안은 더욱 그랬다.   1945년 8월 14일 밤, 아무런 생각이나 소원도 없이 잠들었을 때였다.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진남포로 갔다. 넓은 바닷가에 중학생 때부터 나를 키워준 마우리(E M Mowry) 선교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는 엄청나게 큰 널판자로 지은 창고 두 개가 있었다. 목사님은 나를 이끌고 그 창고로 가 문을 열었다. 높은 창고 꼭대기까지 일본인 시신이 가득 차 있었다. 바닷물 때문이었을까. 시신은 모두 부풀어져 있었다. 놀라서 문을 닫고 다음 창고로 갔다. 그 창고 안에도 일본인의 시체가 가득 쌓여 있었다. 살펴보니까 대학 동창들의 시신도 끼어 있었다. 깜짝 놀란 우리는 창고 밖으로 나왔다. 온 세상이 조용했고 집들과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역사의 사건을 보여주기 위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꿈이었다. 다시 잠들었다.   동쪽 산 너머로 진 붉은 태양   새벽꿈이다. 역사의 저녁 같았다. 나는 한없이 넓은 들 한 모퉁이에서 소에 연장을 메우고 뒤따라 밭을 갈고 있었다. 큰 쟁반같이 붉은 태양이 서쪽이 아닌 동쪽 산 너머로 내려가고 있었다. 저 해가 지면 어둠이 찾아올 텐데, 한없이 넓은 이 땅을 어떻게 다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시간과 역사의 흐름이 정지된 듯싶었다.   아침에 부친에게 꿈 얘기를 했다. 생각에 잠겼던 부친이 “내가 네 나이였을 때 꿈이었다. 동쪽 산 위로 무수히 많은 작은 태양이 떠올라 온 세상에 가득 차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일본의 일장기가 세상을 가득히 메웠는데…. 혹시 무슨 소식이 있을지 모르겠다. 평양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날 낮 12시, 일본 천황의 방송이 전해졌다. “일본군은 무조건 항복하고, 전쟁은 끝난다”는 선포였다. 우리 민족에는 새 역사가 시작되었고, 나는 교육계에서 밭을 갈기 위해 긴 인생길을 출발하게 되었다.   1950년 정월 초하룻날, 새벽의 꿈이다. 어떤 소리의 예감에 놀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내가 들은 소리는 수없이 많은 군인이 중무장하고 넓은 길 남쪽으로 행진하는 발소리였다. 북쪽을 바라보았다. 군대 행렬이 한없이 길었다. 멀리 그 배후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나타나 보였는데, 소련의 스탈린 사진이었다. 나는 놀라서, ‘공산군’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군대의 모습이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체격과 군복이었다. 컴컴한 새벽 시간이었다.   6개월 후에 6·25가 발발했다. 그해 봄부터 북에서는 몇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군사행동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국지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고당 조만식을 남으로 보낼 테니까,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공산당 지도자 이주하·김삼룡과 교환하자는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군사력과 무기 종류 등을 점검했고, 평화를 가장한 인적 교환을 제안했다. 그리고 6월 25일에 전쟁이 발발했다. 나는 정초 새벽꿈이 연상되었기 때문에 26일 월요일에 봉직하던 중앙중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심형필 교장을 찾았다. 이번 군사행동은 틀림없는 전쟁이니까 학교에서 은행에 맡겨둔 적금을 찾아 3개월씩의 봉급을 선불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어차피 공산군에게 빼앗길 돈이기 때문이다.   심 교장은 생각에 잠겼다가 교주인 인촌(김성수)께서 허락해주실지 걱정했다. 나는 선불해 주었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심 교장의 얘기를 들은 인촌은 사리판단이 넓은 분이었다. 그렇게 중앙학교 교직원은 어려운 3개월을 편히 지낼 수 있었다. 3개월 후 서울이 탈환되었으니까. 나도 아내와 세 어린 것들을 서울에 남겨두고 부산까지 피난 갈 수 있었다.   1960년 4월 10일 밤, 꿈이었다. 한밤이었다. 그러나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빛은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혼자 서울시청 앞에서 광화문 네거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차량도 인적도 없고 시간과 역사도 만물과 함께 정지되어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 앞에 도달했을 때 충격적인 장면이 보였다. 네거리 한가운데 직사각형으로 땅이 패었고, 그 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십자가 모습 그대로 누워져 있었다. 가시관도 그대로였는데 순백의 시신 옆구리에서 선혈이 흘러내리는 듯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몸이 떨리고 있었다.   마산 앞바다서 발견된 김주열군 시신   다음날 11일에는 마산 고등학생들이 두 번째로 이승만 정권의 부정투표에 항의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첫 번 데모 때, 최루탄이 눈에 박혀 죽은 김주열군을 경찰이 바다에 버렸는데, 그 시신이 발견되면서 재발한 데모였다. 대구의 중고등학생들도 뒤를 이어 항의 데모에 동참했다. 4월 18일 저녁에는 고려대생들이 당시 국회의사당이었던 현 시의회 앞까지 행진했다가 돌아가는 도중에 자유당이 조종하는 깡패들에게 폭력습격을 받았다. 그 소식에 접한 서울 시내 모든 중고등학교와 대학생들은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4월 19일 데모가 전 서울 시내를 휩쓸게 되었다. 나는 연세대생들과 데모대에 동참하면서 보호 감독하는 일원이 되었다. 데모는 늦은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경무대 앞에서부터 발포 소리가 들려왔다. 서울역 앞에서도 마찬가지 사태가 벌어졌다. 부상당한 학생들은 병원으로 실려 가고, 선량한 학생들은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학생 218명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5일에는 교수들과 시민들까지 데모에 가담했고 27일에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막을 내렸다. 나는 지금도 4·19묘역에 가면 그 당시의 아픈 마음을 생생히 떠올리곤 한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일본 현대사 김주열군 시신 항의 데모 마산 고등학생들

2022-10-14

정치학자 서대숙 박사 별세…한국·북한 현대사 연구 업적

 정치학자로 하와이대학 교수를 지낸 서대숙 박사(사진)가 지난 13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인은 한국과 북한의 현대사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1952년 미국으로 유학 와서 텍사스 기독교 대학, 인디애나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휴스턴대학 교수를 거쳐, 하와이대학 정치학 교수와 하와이대학 한국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임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하와이대 은퇴 후에는 서울대학 초빙교수,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 일본 게이오대학 초빙교수, 연세대학교 용재 석좌교수, UCLA 초빙교수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주요 저서로는 ‘현대 북한의 지도자(김일성과 김정일)’, ‘간도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 김약연’ 등과 많은 영어 논문이 있다.     그의 연구 결과들은 한국에서 언급이 금기시되던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운동을 학술적으로 다룬 반면, 북한에 의해 날조.미화된 부분도 지적해,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로부터 ‘민족적 양심이 있는 학자’라는 평가를 듣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그는 2014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이 박정희.김대중 때보다 낫다”며 “7.4 공동성명과 햇볕정책은 남북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7.4 공동성명의 통일 3대 원칙과 관련해서 “북한 입장에서 ‘자주’는 미군 철수, ‘평화’는 남한의 군사력 증강 중지, ‘민족대단결’은 남한 내 반정부 세력의 강화를 의미한다”는 명쾌한 판단을 밝히기도 했다.   장례 예배는 10월 3일(월) 오전 10시, 웨스트레이크 빌리지의 Pierce Brothers Valley Oaks Mortuary에서 있을 예정이다.    ▶연락: 818-288-6242, 805-498-2050         심종민 기자북한 정치학자 하와이대학 한국학연구소 현대사 연구 서대숙 박사

2022-09-18

[그 영화 이 장면] 패러렐 마더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패러렐 마더스’는 제목 그대로 평행 상태에 있는 두 엄마의 이야기다.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즈)와 아나(밀레나 스밋)는 산부인과의 같은 방을 쓰는 산모이며 같은 날 딸을 낳는다. 하지만 병원의 실수로 두 사람의 아이는 바뀌어 버리고, 이후 그들의 삶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좀처럼 맞닿지 못한다.   두 엄마가 살아가는 현재가 가로축이라면, 이 영화엔 과거에서 내려오는 세로축이 존재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 증조부를 잃은 야니스는 법의학자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의 도움으로 매장된 마을 사람들의 유해 발굴 사업을 시작한다. 후손으로서 스페인 현대사의 비극을 기억하는 과정이다.   아이가 바뀌면서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야니스와 아나의 평행 관계는 그들이 함께 발굴 현장으로 가면서 드디어 만나게 된다. ‘패러렐 마더스’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인데, 야니스의 할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과 아나와 그의 딸까지, 세대를 초월한 여성들의 거대한 연대를 위풍당당하게 보여준다.   당시 희생자들의 사진을 품에 안고 무리 지어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생존자들이 역사 앞에서 벌이는 행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후 현장에 도착한 그들은 수십 년 전 학살이 이뤄졌던 장소와 유해를 확인하고, 그곳에 빼곡히 누워 선조들이 겪었던 억울한 죽음을 재현한다. 이것은 진심 어린 추모이자 폭력의 역사에 시위하는 퍼포먼스다. 김형석 / 영화 저널리스트그 영화 이 장면 패러렐 마더스 패러렐 마더스 스페인 현대사 유해 발굴

2022-07-15

[분수대] 바비 야르

 바비 야르.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교향곡 13번은 이렇게 불린다. 바비 야르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이름이다. 독일과의 전쟁의 한창이던 1941년 9월의 어느 날, 나치 친위대(SS)는 바비 야르에서 집단 학살을 저지른다. 유대인, 집시, 우크라이나인 등 3만명이 넘는 이들이 독일군 기관총에 희생됐다.   쇼스타코비치는 예브게니 옙투셴코(1933~2017)의 시를 가사로 삼아 이를 추모했다. 러시아 내 반 유대인 정서를 비판한 옙투셴코의 시를 인용한 교향곡 13번은 1962년 12월 18일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서 초연이 이루어졌다. 소비에트 정권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경찰이 공연장 밖에서 대기했고 프로그램 북도 배포하지 않았다.   쇼스타코비치의 일생은 러시아 현대사 그 자체다. 그는 정권에 순응했고, 비판했고, 예술적 자유를 강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줄리언 반스는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다룬 『시대의 소음』에서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중략)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적었다.   바비 야르가 또다시 전쟁의 포화 속으로 빨려 들어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러시아 10만 병력이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으로 이동했고 내년 초 침공할 수 있다는 주장이 외신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2014년 크림반도 강제 점령처럼 러시아가 실효 지배할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침공에 앞선 러시아의 서방 국가 견제는 노골적이다. 러시아 정부는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연결되는 야말-유럽 가스관을 잠갔다. 우크라이나를 경유해 유럽으로 가는 가스 공급도 20% 가까이 줄였다고 한다.   러시아 리스크에 겨울철 가스 대란 가능성이 커지며 에너지 수급에도 비상이 걸렸다. 가스 공급이 막히며 유럽 가스 가격은 치솟고 있다. 천연가스 소비 중 러시아 수입이 차지하는 건 5% 수준에 불과하지만 세계적인 에너지 대란이 이어질 경우 한국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다가온 에너지 대란보다 더 우려되는 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쇼스타코비치가 ‘바비 야르’에 담았던 차별에 대한 저항과 자유는 지금도 시대의 소음에 묻혀 있다. 이를 드러내는 건 우리의 몫이다. 강기헌 / 한국 산업1팀 기자분수대 바비 러시아 현대사 러시아 작곡가 러시아 리스크

2022-01-02

[J네트워크] 쇼스타코비치의 ‘바비 야르’

 바비 야르.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교향곡 13번은 이렇게 불린다. 바비 야르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이름이다. 독일과의 전쟁의 한창이던 1941년 9월의 어느 날, 나치 친위대(SS)는 바비 야르에서 집단 학살을 저지른다. 유대인, 집시, 우크라이나인 등 3만명이 넘는 이들이 독일군 기관총에 희생됐다.   쇼스타코비치는 예브게니 옙투셴코(1933~2017)의 시를 가사로 삼아 이를 추모했다. 러시아 내 반 유대인 정서를 비판한 옙투셴코의 시를 인용한 교향곡 13번은 1962년 12월 18일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서 초연이 이루어졌다. 소비에트 정권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경찰이 공연장 밖에서 대기했고 프로그램 북도 배포하지 않았다.   쇼스타코비치의 일생은 러시아 현대사 그 자체다. 그는 정권에 순응했고, 비판했고, 예술적 자유를 강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줄리언 반스는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다룬 ‘시대의 소음’에서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중략)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적었다.   바비 야르가 또다시 전쟁의 포화 속으로 빨려 들어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러시아 10만 병력이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으로 이동했고 내년 초 침공할 수 있다는 주장이 외신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2014년 크림반도 강제 점령처럼 러시아가 실효 지배할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침공에 앞선 러시아의 서방 국가 견제는 노골적이다. 러시아 정부는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연결되는 야말-유럽 가스관을 잠갔다. 우크라이나를 경유해 유럽으로 가는 가스 공급도 20% 가까이 줄였다고 한다.   러시아 리스크에 겨울철 가스 대란 가능성이 커지며 에너지 수급에도 비상이 걸렸다. 가스 공급이 막히며 유럽 가스 가격은 치솟고 있다. 천연가스 소비 중 러시아 수입이 차지하는 건 5% 수준에 불과하지만 세계적인 에너지 대란이 이어질 경우 한국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다가온 에너지 대란보다 더 우려되는 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쇼스타코비치가 ‘바비 야르’에 담았던 차별에 대한 저항과 자유는 지금도 시대의 소음에 묻혀 있다. 이를 드러내는 건 우리의 몫이다. 강기헌 / 한국 중앙일보 기자J네트워크 쇼스타코비치 바비 러시아 현대사 러시아 작곡가 러시아 리스크

202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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