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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추억의 항아리 껴안고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옆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중략)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 천양희 ‘오래된 가을’ 중에서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도 오늘도 떠나간다. 무성한 초록으로 아름드리 서 있던 나무들도 찬란한 옷을 벗고 하나 둘 흩어진다. 낙엽은 아침 이슬로 눈물을 감추고 밟힐 때마다 바스락 신음 소리 내며 작별을 서두른다. 계절은 등을 돌이며 빛바랜 정원에 추억의 꽃 씨 한 알 떨어트린다.     묵은 것들은 농익은 맛을 낸다. 상큼하진 않지만 감칠 맛으로 다가온다. 겉절이는 풋풋하고 신선한 맛을 내지만 오래 두고 먹을 수 없다. 추억의 정원에는 오래 되고 빛이 바랜, 콤콤한 냄새 나는 해묵은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묵은지는 오래된 김장 김치로 양념을 강하지 않게 해 담근다. 저온에서 6개월 이상 숙성시켜야 제 맛이 나는데 오래 숙성 저장 할수록 맛있고 깊은 맛을 낸다. 추억의 창고에 묵은지가 많은 사람의 하루는 가을 햇살처럼 따스하다. 묵은지는 일반 김장김치보다 조금 짜게 담궈야 긴 겨울을 버틴다. 인생의 짠 맛, 신 맛, 험한 맛을 많이 본 사람은 엄동설한을 버틸 힘과 용기를 얻는다.     너무 빨리 숙성된 김치는 금방 신맛이 나지만 묵은지는 서서히 오랜 기간 발효되기 때문에 시어지지 않는 게 특징이다. 짧은 시간 한 방에 날리는 성공은 쉽게 사그러들지만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으로 일군 삶은 묵은지처럼 오래 지속된다. 묵은지 배추는 속이 덜 차고 푸른 잎이 많으며 단단한 것으로 골라야 한다. 사는 게 마음에 덜 차고 적게 가져도 늘 푸른 잎새로 마음 단단히 먹고 살면 묵은지처럼 깊은 맛을 낼 수있을까?     김장은 배추를 소금물에 담군다는 침장(沈藏)에서 나왔는데 김장으로 바뀌게 됐다. 김치는 침채(沈菜)에서 유래됐는데 딤채→김채→김치로 변형을 거듭했다. 김치가 제 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 땅에서 뽑힐 때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한 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며 다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 돼 죽고,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마지막으로 죽는다. 김장 담그는 일은 다가올 험난한 엄동설한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의식이다. 익숙한 손 맛으로 오래된 정원에서 해묵은 추억의 불씨 하나 지피는 일이다. 난로가에서 톡 톡 튀는 밤톨 까먹던 유년의 시간으로 연어처럼 거슬러가는 일이다.   오늘이 허전한 그대여. 계절의 끝자락 붙잡고 허우적거리는 그대여! 사무치게 그리운 날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묵은지로 남아있는 추억의 항아리를 꺼내 보세요. 못 견디게 힘든 날만 열어보세요. 너무 자주 열어 보면 그 아름답던 날들이 빨리 시어질지 몰라요. 추억의 항아리는 우거지로 단단히 덮어 땅 속 깊이 묻어 두세요. 찹쌀 풀 섞은 물에 고춧가루와 고추씨를 개고 멸치액젓 다진 마늘과 생강 소금을 넣듯 생의 모든 슬픔과 기쁨, 황홀한 추억들 모두 담아 꼭 꼭 봉해 묻어 두세요. 외로울 때면 오래된 정원에서 은근하게 잘 익은 묵은지 항아리 꺼내 빛바랜 어제를 이지러지게 껴안아 주세요.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항아리 추억 묵은지 항아리 일반 김장김치 추억들 모두

2024-11-05

[아트&디자인] 달을 사랑한 화가 김환기, 그를 다시 알게 된 100일

“여전히 항아리를 그리고 있는데 이러다간 종생 항아리 귀신만 될 것 같소.”   전시장에서 이 문장을 보고 슬며시 웃음이 났습니다. 이 작가가 누구인지 짐작되시는지요. 네, 맞습니다. 김환기(1913~1974)입니다. 1956년 파리로 간 그가 이듬해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여전히 항아리를 그리고 있다”며 쓴 것입니다.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5월 18일 개막한 ‘한 점 하늘 김환기’ 전시가 100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10일 막 내렸습니다. 회화와 드로잉, 신문지 작업과 스케치북 등 약 120여 점을 망라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미술관에서 이런 규모로 열린 김환기 전시가 거의 40년 만이었습니다. 197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주기 전시, 1985년 10주기 전시가 열린 적 있는데요, 이번이 역대 최대 규모였습니다.   전시의 감동은 규모 그 자체보다 내용의 깊이에서 왔습니다. 정제된 구성으로 배치된 그림과 글은 그의 화폭에서 달과 달항아리가 점으로 변화해가는 여정을 선명하게 보여줬습니다. 다시 ‘항아리 귀신’ 얘기로 돌아가 볼까요. 김환기가 왜 그토록 집요하게 달과 항아리를 그렸는지 궁금하시죠. 그는 달항아리의 빛과 형태에서 한국적 추상화의 가능성을 보았고, 자신의 화폭에 이를 실현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형과 늘 얘기했지만 코르뷔제(르코르뷔지에,1887~1965) 건축이나 정원에다 우리 이조자기를 놓고 보면 얼마나 어울리겠소.” 1953년 김중업(1922~1988) 건축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현대 건축의 선구자’ 르코르뷔지에의 건축과 백자를 함께 언급한 대목도 눈에 띕니다. 시대를 초월해 아름다움의 본질을 꿰뚫어 본 예술가의 안목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참 신기하죠. 전시를 보면 볼수록, 그리고 작가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될수록 사실은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좋은 미술관 전시일수록 작가를 새로 발견하는 경험을 선사합니다.   김환기의 그림 한 점 가격이 2019년 132억원을 기록했다는 것은 너무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오십 넘은 나이에 낯선 땅 뉴욕에서 하루는 절망하고, 또 하루는 자신감 얻기를 반복하며 작업을 지속해 온 그의 삶을 차분히 조명했습니다. 전시를 위해 작품을 대여해준 개인 소장가가 40명에 달하니 아무 때나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모로 한국 미술사에 기록될 의미 있는 전시입니다.   삼성문화재단에 따르면 이번 전시를 본 관람객은 15만 명에 이릅니다. 2021년 ‘야금(冶金): 위대한 지혜’ 전을 본 관람객 수의 3배입니다. 이 전시를 놓쳐 너무 아쉽다면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열리는 ‘환기, 점점화(點點畵) 1970-74’(12월 3일까지) 나들이는 어떨까요. 우리는 지금도 김환기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이은주 / 한국 문화선임기자아트&디자인 김환기 사랑 김환기 전시 하늘 김환기 항아리 귀신

2023-09-13

[항아리 도예 공방] 20일 ‘Play with Clay’…“나만의 작품 빚어볼까?”

찰흙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세라믹 스튜디오 ‘항아리 도예 공방(Hannghari Ceramic Studio, 대표 김희정)’은 최근 LA 다운타운 소재 LA FACE MART로 이전했다고 밝혔다.     항아리 도예 공방은 새 장소로의 이전을 기념해 오는 8월 20일(토),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Play with Clay’ 이벤트를 실시한다. 행사 당일 입장료는 10달러이고 5세 미만은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김희정 대표는 “Play with Clay는 글자 그대로 ‘흙장난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흙덩어리를 손으로 조물조물 빚어 원하는 무엇이든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어린아이부터 나이 드신 분들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준비했다”라고 전했다.    또한 “흙을 만지다 보면 기분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다시 바로 세워진다. 정신 수양과 힐링에도 도움을 주는 만큼 많은 분들께서 이번 이벤트에 참여하셔서 즐겁고 특별한 흙놀이를 경험해 보시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Play with Clay 체험은 1~2시간 정도 소요된다. 찰흙 공은 개당 5달러. 완성한 작품에 칼라와 소성(가마에 굽는 과정)을 원하면 5달러를 추가하면 된다. 이 경우 3주 후 픽업해 가져갈 수도 있어 집에 두고 사용하거나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하기에도 좋다.     편한 복장은 필수. 이벤트 체험은 전화 또는 웹사이트(www.hannghariceramics.com)를 통해 사전 예약할 수 있다.     ▶문의: (213)393-3710   1458 S San Pedro Street #243, Los Angeles 항아리 도예 항아리 도예

2022-08-08

[뉴욕의 맛과 멋] 숨어있던 보물 ‘매실’

내 김치냉장고 한쪽은 한국의 된장, 고추장 등 장류 저장고이다. 어제 배추 된장국 끓이려고 된장과 고추장을 꺼내는데 고추장이 든 작은 용기가 서너개가 되었다. 한국서 올 때 친구들 혹은 지인들이 준 것을 먹다 보면 그렇게 된다. 보통 때도 늘 보던 장면이지만, 왠지 눈에 거슬려서 “이걸 한데 모아야지” 싶었다. 꺼내다 보니 오른쪽 구석에 밑에 매실 병이 있다. 매실청 건더기인데, 뚜껑에 2017년 5월 14일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다.     요즘은 셰프들도 요리할 때 보면 매실청이 빠지는 적이 없다. 매실이 워낙 천연소화제에 기관지와 피로해소에 좋다고 해서 매실청 담는 집이 많다. 나도 덩달아 매실 장아찌를 몇 번 담았다. 매실 씨에 독성이 있다고 해서 씨를 다 빼고 담았는데, 씨 빼는 작업이 하도 일이 많아 몇 번 만들다 포기했다. 그러다가 매실을 씨째로 담아도 일 년 동안 숙성시키면 독이 다 빠져서 아무 상관 없다는 말을 듣고 작년에 다시 매실청을 담았다. 5월에 일 년이 된다.   나는 신 것을 매우 싫어해서 매실청 따르고 나면 건더기는 그냥 버렸다. 그 신맛 나는 매실로 장아찌를 만든다든가 하는 건 엄두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매실이 비싸니까 아깝단 생각이 없진 않았나 보다. 그래서 버릴 날을 미루다가 잊어서 밑에 깔린 바람에 얘는 아직 명줄이 남았던 것이다.     첨엔 그냥 버리려고 했다. 그래도 씨를 빼고 만드느라 애썼던 내 노동에 미련이 남아 형식적으로 한쪽을 먹어 보았다. 그리고 얼떨떨해졌다. 아직도 오돌오돌한 매실은 신맛은 무늬뿐, 뭔가 입맛을 돋워주는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만 5년 동안 숙성되었으므로 신맛이 그동안 무뎌지고, 청은 따라낸 후이니 당도도 적당했다. 조금 꺼내어 간장에 살짝 무쳤더니 은근히 입 안을 사로잡는다. 마치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손댄 김에 신이 나서 내가 먹을 것은 그렇게 간장에 버무리고, 나머지는 고추장에 버무렸다. 늘 소화 문제로 골치 썩는 첫째에겐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것 같고, 친구들에게도 나누어주면 좋을 것 같다. 매실 장아찌는 이렇게 청을 따르고 남은 건더기를 입맛에 맞게 간을 해서 장아찌로 먹으면 되는데, 진즉에 그러지 못한 일이 새삼 아깝기 짝이 없다.   시답잖게 여겼던 매실의 발견이 마치 숨은 보물찾기에서 보물 찾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사실 우리 어릴 적엔 안방 위에 있던 ‘다락’이 보물창고였다. 다락 위엔 꿀이며 엿, 밤, 곶감 등 우리들의 간식거리가 있었지만, 아이들에겐 접근금지의 성역이었다. 그것을 몰래 훔쳐 먹을 때의 스릴과 두근두근 가슴 뜀. 들켜서 혼나도 마냥 즐거웠다. 그리고 겨울이면 뒷마당 항아리에서 짚 위에 켜켜이 쌓여 있는 홍시가 익기를 기다리던 안타까움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보니 어릴 때의 그 기다림과 설렘과 애달픔의 시간이 우리에겐 인생의 인내와 절제를 위한 숙성기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사순절이다. 5년을 묵히니까 원래의 신맛이 무뎌지고 순해진 매실을 보면서 나를 돌아본다. 푹 삭은 매실처럼, 오래된 장처럼, 세월의 두께가 인성의 향기로 담금질 된 사람을 보면 아무 말 없이 옆에만 있어도 평화를 느끼고, 신뢰와 치유가 모르는 새 스며든다. 언젠가는 나도 매실처럼 깊이 숙성되어 사람들에게 그렇게 스며들 수 있겠지. 그 날을 기다리며….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보물 매실 된장 고추장 김치냉장고 한쪽 뒷마당 항아리

202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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