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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한자어는 어느 나라 말인가?

한자와 한자어는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한글과 한국어가 완전히 다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문자와 언어를 구별하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글날에 한국어가 매우 과학적이라는 말을 듣는데, 이 말은 이상한 주장입니다. 한글은 과학적일 수 있지만, 한국어는 과학적이라는 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한자와 한자어는 문자와 어휘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에도 한자어는 많지만 한자는 전혀 쓰지 않고 있습니다. 한자를 쓰는 것과 한자어를 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순우리말을 쓰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순’이 한자어라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한자어 없는 언어생활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기초어휘에도 이미 한자어가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기초어휘란 오랜 역사에도 변하지 않고 사용되는 어휘입니다.     따라서 비교언어학의 주 대상입니다. 자연이나 신체어, 색채어, 친족어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하늘, 해, 달, 별, 땅과 같은 자연어나 머리, 눈, 코, 귀, 입 등의 신체어와 검다, 희다, 푸르다, 붉다와 같은 색채어, 아들, 딸, 엄마, 아빠 등과 같은 친족어가 기초어휘에 해당합니다. 모두 순우리말이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기초어휘 속에서도 한자어휘가 발견됩니다. 대표적으로 산(山)과 강(江)이 있겠네요. 또한 초록색이나 주황색, 남색은 당연히 한자어입니다. 친족어 중에도 형, 동생, 삼촌 등은 한자어입니다. 이렇듯 한자어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예전에 어린아이가 한문을 배우던 책인 소학을 한글 창제 이후 번역을 하게 됩니다. 두 가지 종류가 출간되는데, 하나는 번역소학(1518년)이고, 다른 하나는 소학언해입니다. 번역소학과 소학언해는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두 태도를 보여주며, 특히 번역소학에는 의역이 많아서 우리말 속에 한자 어휘가 얼마나 널리 사용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한문을 배우는 책이기 때문에 한자어가 많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어가 얼마나 이른 시기에 우리말 속에 자리 잡았는지를 살펴보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번역소학에는 한자가 병기되어 있는 어휘가 나타나서 흥미롭습니다. 주로 고유명사인 인명이나 지명은 한자를 먼저 쓰고, 우리말을 적습니다. 공자, 안연, 맹자 같은 표현이 그 예가 됩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글에서 핵심어, 주제어로 보이는 말은 한자를 함께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덕, 학문, 강론, 쇄소응대, 선생 등의 단어는 한자에 우리말을 병기하여 쓰고 있습니다. 현재도 여전히 가독성을 위해서나 핵심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한자를 섞어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한자로 쓰지 않은 한자어입니다. 이 말들은 한자로 쓰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물론 지식인층이 주 대상일 수는 있었지만, ‘소학’이 어린아이용 학습서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한자어가 이미 생활 속에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상, 례, 현인, 온공, 경계, 부모, 덕, 구하다, 후, 자제, 피하다, 흉하다, 길하다는 한자와 병기된 표기로 나타나기도 하고, 한글로만 쓰이기도 합니다. 혼동이 있음을 볼 때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듯합니다.     번역소학에 한자로 쓰이지 않은 말을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500년 전에도 쓰이던 어휘를 보면서 한자어는 어느 나라 말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자어 나라 친족어가 기초어휘 한자 어휘 신체어 색채어

2024-07-14

[우리말 바루기] ‘반증’, ‘방증’

어떤 사실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나타낼 때 ‘반증’이라는 단어를 쓰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방증’이 맞는 말이다. ‘방증’과 ‘반증’은 단어의 모양과 발음이 비슷해 헷갈리기 쉬운 단어다.   ‘방증’은 사실을 직접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되지는 않지만 주변의 상황을 밝힘으로써 간접적으로 증명에 도움을 주는 증거를 뜻한다. 따라서 “내신 관리가 엄격한 학교에서조차 비리가 발생한 것은 내신비리가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는 방증이므로 전국 모든 고등학교의 내신비리 전수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반증’은 어떤 사실이나 주장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그에 반대되는 근거를 들어 증명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혐의를 부인했지만 그것을 반증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그의 주장은 논리가 워낙 치밀해 반증을 대기가 어렵다” 등과 같이 사용된다.   ‘방증’과 ‘반증’의 한자어 구성을 살펴보면 두 단어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반증(反證)’은 ‘뒤집을 반(反)’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반대되는 증거’의 경우 ‘반증’을 쓰면 된다.   ‘방증(傍證)’은 ‘곁 방(傍)’자를 써서 ‘곁에 있는 증거’, 즉 주변에 있는 증거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정황을 뒷받침하는 간접적인 증거를 가리킨다.우리말 바루기 반증 방증 내신비리 전수조사 한자어 구성 내신 관리

2023-02-06

[잠망경] 따스한 가을

티. 이. 흄(T. E. Hulme: 1883~1917)의 짧은 시 ‘가을’(1908) 전문을 소개한다.   약간 차가운 가을 밤에/ 시골 길을 걸었네/ 그리고 얼굴이 벌건 농사꾼 같은/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 몸을 구부리는 걸 보았네/ 나는 멈춰 서서 말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네/ 그리고 주변에는 동네 아이들처럼 얼굴이 하얀/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었다네   시에 있어서 흄은 낭만과 고전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오는 이미지즘(imagism)을 이룩한 창시자로 손꼽힌다. 말 수와 수식어를 최소한으로 줄여 말하는 이미지즘 기법은 시뿐만 아니라 껍데기를 벗겨 놓은 언어의 누드(nude) 데생 같다.   이미지즘은 로코코 스타일의 은유와 상징에 익숙한 예술 비평가들에게는 데면데면하게 느껴지는 시작법이다. 햇볕에 타서 붉어진 농사꾼의 얼굴처럼 보이는 달과 그 주위를 감싸 도는 동네 아이들의 하얀 얼굴, 어른과 아이, 달과 별의 관계가 왠지 참 따스하다는 인상을 풍긴다.   옛날 내 시를 들척이다가 읽기에 데걱거리는‘따스한 가을’(2004)을 훑어본다. 좀 너저분한 전문이 이렇다.   바람 찬 오후에/ 간들간들 떨어지는 잎새에서/ 비릿한 향기가 나는구나 그 냄새는/ 중세기 시절 몸집이 우람한 기사가 사랑하던/ 송충이 같은 속눈썹에/ 코가 알맞게 큰 귀부인 체취라고/ 우기면 고만이다, 나는/ 바람결에 바스락대기만 하고/ 전혀 딴짓을 못하는 빨강 노랑 잎새들은/ 자기들이 어떤 향기를 풍기건 말건/ 도무지 개의치 않는다/ 하늘 빛 짙은 어느 오후에/ 나 몰라라 하며 밑으로 밑으로만 떨어지면 고만이다, 곧장   시대와 환경을 전혀 다르게 태어난 흄과 내가 우연히도 ‘약간 차가운 가을 밤’, ‘바람 찬 오후에’ 하며 거의 같은 억양으로 피부에 와 닿는 가을 공기의 촉감에 첫 운을 던졌다는 일이 신기하다.   흄은 이미지즘의 속성에 걸맞게 시각적인 묘사로 독자의 감각을 유인한다. 반면에 나는 후각을 들먹이는 데에 심혈을 기울인 듯하다. 나 또한 몸집, 송충이 같은, 코가 알맞게 큰, 빨강, 노랑 등등 시각에 신경을 쏟으면서 ‘바람결에 바스락’대는 청각효과마저 삽입한다. 흄에 비하여 나는 좀 너절하고 반복적이라서 간결성에서 점수가 많이 떨어지지만, 시대가 다르고 사람 성격이 다른 걸 어찌하나.   가을은 다채로운 색감(色感)이 아우러지는 시각의 계절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계(色界)가 따로 없다니까. 온 천지가 삼원색(三原色)으로 뒤범벅이 된다. 새빨간 단풍, 꾀꼬리단풍이라는 별명을 가진 단무지처럼 샛노란 잎새들, 그리고 저 물색 모르고 파랗기만 한 인디고블루, 쪽빛 하늘!   가을이 여름보다 더 뜨겁다는 생각을 오늘 처음 했다. 기실 한자어 가을 추(秋)도 벼 화(禾)에 불 화(火)가 합쳐져서 농익어 타오르는 한가을 황금 논밭을 연상시키는 시적(詩的) 표현이다. 가을은 뜨거운 계절이다. 갑골문자에 벼 禾 옆에, 불 火 대신 메뚜기 그림이 있었다지만 솔직히 나는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순우리말 가을은 더욱더 시적이다. 가을의 어원은 곡식이나 과일을 ‘끊어내다’는 뜻의 고어 ‘갓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시옷 발음이 이응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남부 지방에서는 ‘추수하다’의 방언으로 ‘가실하다’는 말을 쓰고 있다 한다. 가을에 곡식과 과일을 끊어내지 않는다는 것은 갓난아기의 탯줄을 끊지 않는 것이나 조금도 다름없다.   가을은 정말 따스한 수확의 계절이다. 가을은 계절의 클라이맥스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가을 한가을 황금 순우리말 가을 한자어 가을

202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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