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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부동의 평강을 위하여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상공회의소가 마련한 조찬 미팅에서 서부의 모자를 하나 선물 받았다. 사진 기자들이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도록 케네디에게 써보라고 권했을 때 케네디 대통령은 그 다음 월요일에 백악관으로 오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그 날 오후 달라스에서 암살당했기에 다시는 백악관에 돌아가지 못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항상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살아가고 있는 방향,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아가고 곳에 대하여서는 생각하고 기대하는 바가 있을 때 혼동이나 방황이 적은 행로가 될 것이다. 사람은 한 치 앞도 모른 채 살아가면서도 흔연하게 내일을, 한 해를 그리고 먼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날을 염려하고 걱정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습관을 만드는 동물로 정의될 만큼, 예상이 가능한 익숙한 환경을 만들어내고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불청객이나 기대치 않은 일을 만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상에 불쑥 끼어드는 일이나 놀라게 되는 일은 설사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어도 계획에 차질을 빚고, 일상을 흔드는 것이라면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삶에 무언가가 끼어들어 기존의 상황을 흔드는 일이 없이 도약적인 발전이나 참신한 방향 전환이 일어나기는 어렵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의 위대한 일들은 급작스런 변화와 개입으로 일어났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새 창조의 부분으로서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심오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는 여러 부분에 걸쳐 급작스런 변화나 생경한 일들에 대해 예비하도록 권면한다.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의미는 예기치 못한 일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삶에 찿아드는 불청객이나 예기치 못한 사태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며 삶의 흐름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당면한 상황을 수용할 줄 아는 융통성은 자기가 세운 목표나 심지어는 각자의 개성까지도 포기하고 삶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임을 인정할 때 가능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그것을 순종이라고 하고, 또 겸손이라고 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 때론 고통에 대해 어떤 대답을 발견할 수 없을지라도 다른 관점을 찿고, 궁극적으로 숨겨진 의미나 축복의 실마리를 구하는 것이 신앙여정이다.   하나님을 믿고 그 앞에 나아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히브리서에 나와있다. 결코는 확실한 약속이며 하나님을 찿는 이를 위해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신다는 뜻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인생의 전부라면 나이만 고려해도 많은 이들의 삶은 이미 승패가 나있고 남은 생이 뻔하다. 그러나 피조물의 세계를 넘어 창조주의 세계와 그 약속을 그리고 기대하는 삶이라면 일상의 사건 때문에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치 앞을 예견하지 못하나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부동의 평강을 새해의 계획표 아래 받쳐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위한 기도”는 흔들림 없는 평강을 위한 대표적인 기도문이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또한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하루하루 살게 하시고/ 순간순간 누리게 하시며/ 고통을 평화에 이르는 시련쯤으로 받아들이게 하옵고,// 죄로 물든 세상을 내 원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옵시며,// 당신의 뜻에 순종할 때/ 당신께서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 땅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저 세상에서는 다함이 없는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옵소서.” 위로부터의 평강이 임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종려나무 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부동 평강 케네디 대통령 에프 케네디 계획표 아래

2022-01-07

[종교 시론] 사랑과 평강의 침묵

 최근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하나님은 위대한 사랑을 위해 침묵으로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신다는 신앙의 역설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있었다.     1638년 3월 25일 '산타 이사벨'호에 승선한 세 젊은 사제들은 일본 선교를 위해 포르투갈의 리스본 항을 출발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횡단하고 마카오를 지나 나가사키 지역으로 밀입국을 했다. 젊은 사제들은 목숨을 걸고 선교를 했지만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너무나도 혹독했다. 펄펄 끓는 온천수로 고문을 당하는 수많은 신도들과 안개비 내리는 바다 속으로 돌덩이 마냥 가라앉는 신도들의 순교현장에서도 아무런 말씀이 없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그들은 원망을 했다.     "하나님 왜 아직도 침묵하고 계십니까?"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그들이 무신론자가 되거나 아니면 믿음이 시련에 부딪쳐 결국 불신앙을 드러내 놓게 된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경험하고 있다. 곤혹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 너무나 완강하고 장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못 견뎌 하고 하나님이 침묵 중에 일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은 절망이라고 쉽사리 단정을 짓는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시종일관 침묵을 하시는 걸까. 하나님은 태초적 침묵 자체이며 스스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침묵은 용서와 사랑을 위한 토대이자 하나님의 본질이며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진리로 전달된다. 하나님의 침묵은 냉담한 무관심이 아닌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평강의 침묵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다리시며 침묵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은 포도나무에 연결되어 있는 가지가 침묵 속에서 가지에 수액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포도가 자연스레 열리는 원리와도 같다. 가지는 포도나무에게 왜 침묵하느냐고 묻질 않는다. 그냥 묵묵히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면 포도나무는 사랑의 수액을 가지로 흘려보내 열매를 맺게한다.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에 침묵이 존재하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침묵을 통한 지속적인 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침묵 속에 깊이 가라앉아 분해되어 침묵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침묵과 결합하기 위함이다. 결국 우리는 침묵이 가져다주는 신뢰감으로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침묵 속에 커다란 도움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단지 너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란다."   우리가 침묵 가운데서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 평강의 침묵 속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완벽한 침묵은 완벽한 말의 메아리로 들린다."     침묵을 간결하게 정리한 막스 피카르트의 말이 지금 내 영혼 속에서 울리고 있다.  손국락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ㆍ라번대학 겸임교수종교 시론 사랑 평강 태초적 침묵 침묵 가운데 시종일관 침묵

202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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