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광장] ‘편작이 열이 온들 … ’
‘편작이 열이 온들 이병을 어찌하리…’ 는 지금부터 434년 전, 선조 임금 때 정승이었던 송강 정철의 ‘이몸 삼기 실제 님을 조차 삼기 시니…’ 로 시작하는 사미인곡에 나오는 구절이다. 정철이 당파싸움에 말려들어 전라도 지역으로 귀양 가 쓴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담은 긴 가사의 끝부분에 나오는 한탄인데, 언제부터인지 마음이 답답할 때 혼자 외어 보는 구절이 됐다. 최근 작품 해설을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알지 못했던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사대주의와 한문숭배가 지배했던 시대에 정철은 한글로 이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 반포하고 142년이 지난 시점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글은 여자들이나 쓰는 ‘암글’ 이라며 무시를 당했는데 그런 ‘암글’로 긴 가사를 썼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으리라. 문학적인 아름다움에 더해 한글의 위상을 높여 준 명작으로 길이 빛나는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작품의 끝부분에 나오는 ‘편작이 열이 와도 이병을 어찌하리’ 라는 구절은 마음의 병이 너무 깊어서, 천하의 명의라는 편작 같은 인물 열 명이 와도, 고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다는 원망 섞인 한탄이다. 편작은 약 2500년 전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의로 알려진 인물이다. 요즘 미국에서는 정치, 사회적 갈등이 깊어지면서 이로 인한 폭력 사태도 빈번해지고 있다. 합리적인 합의 대신 폭력, 특히 총기를 이용한 범죄가 크게 늘면서 ‘편작 열 명이 와도 고칠 수 없다’는 정철의 한탄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미국은 건국 이래 모든 국민의 권리를 존중하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 광대한 땅에 풍부한 자원까지 가진 복 받은 나라다.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잘살 수 있는 ‘이상향’으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살고 싶어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살고 있다. 그리고 현재도 이민 신청 수속을 밟으며 입국 비자를 기다리는 사람만 8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목숨을 걸고 산 넘고, 물 건너 미국 땅에 들어오려는 비합법 이민자들도 많다. 이 같은 이민증가 상황을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양 진영 간의 충돌은 점점 첨예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고,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그야 말로 ‘편작이 열이 와도 좀처럼 고칠 수 없는’ 난제 중의 하나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편작도 고치기 어려운 또 한가지 병은 최근에 부쩍 늘어난 총기 관련 범죄다. 불과 석 달 전에도 텍사스주의 유발디 초등학교에서, 교사 2명과 어린 학생 19명의 목숨을 빼앗은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졌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총기 폭력이 미국 전역에서 매일 발생하고 있다. 특히 중간선거를 앞둔 요즈음에는 보수, 진보 지지자 중 과격파들의 극단적 행동이 우려되고 있다. 일반 국민은 물론 정부조차 총기 사용 범죄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체념에 빠진듯하다. ‘편작이 열이 온 들 이병을 어찌하리’ 라는 탄식이, 시간적으로는 수백 년, 공간적으로는 수만 리 넘는 미국 땅에서도 어려운 상황에 대한 탄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정철은 상상이나 했을까? 김순진 / 교육학 박사열린 광장 편작 총기 폭력 이민증가 상황 총기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