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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나와 대중의 경계에서

한국의 수도권 전철인 양재역, 신분당선과 3호선의 환승 통로에 이어지는 이 곳의 인파는 개울물 흐름 같다. 입술은 침묵하고, 기린처럼 펭귄처럼, 혹은 오리 떼처럼 양방향으로 가쁘게 순행한다. 이따금 귀따가운 조잘거림이 거슬리지만 곁가지로 제쳐지기 마련이다. 개울은 그렇게 끊임없이 흐를 것이다.     전동차에 올라서도 침묵은 계속되고, 서서도 앉아서도 각자도생, SNS에 몰입하거나, 시선의 피난처를 찾거나, 혹은 수면의 늪에 빠져 있다. 바로 옆의 승객과도 눈길 한 번 나누지 않는다.     거리에 나가서도, 상가에서도 유리벽을 친 듯이 서로 무관심하고 매정하다. 세상이 묵언고행(默言孤行)의 도가니이지 싶다.  누구나 집을 나와 떠돌더라도 보이지 않게 가정과 친지들, 동료들, 그리고 일터 같은 사회적 얼개와 제도에 연결돼 있다. 항공모함을 떠난 전투기들이 모함과 불가분의 관계인 점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흩어져 있으면 개성을 품은 시민이고, 모이면 고기압의 군중이 되곤 한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습관처럼 신문과 TV 뉴스를 잠깐 들여다본다. 지하철역까지 나오는 동안에는 아직 따끈한 뉴스의 내용과 그와 연관된 세상사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맴돈다. 매스 미디어는 몰려오는 소식 만이 아니라 생활과 정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적인 요인과 현상을 두뇌 깊숙이 쏟아붓는다.     21세기의 대중은 대중문화를 포식하며 놀랍게 성장하고 있다. 대중문화를 입고, 대중문화를 숨 쉬고, 대중문화 속을 헤엄치고 있는 나도 대중인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음을 빤히 알면서도 때때로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는 이유는 대중의 양면성 때문이리라.         지구촌이 현대에 이르러 산업화로 치달으면서 대중의 기세는 온 누리에 걸쳐 팽창 일로를 걸었다. 조직화하지 않은 상태지만 뭉치면 엄청난 위력으로 폭발할 잠재력을 내장하고도 있다. 시민사회의 보편주의를 전통사회의 권위주의보다 우위에 견인했고, 인본을 신장시킨 사회변동의 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회사이다. 반면에 대중은 구체적인 상수 개념이 아니고 비조직적이다가 일단 군중으로 모이면 대중심리를 타고 고도의 휘발성을 띄기 때문에 위험하고 무섭다.       민주 국가에서 정당한 민의가 국정과 사회 경영에 효율적으로 반영되는 일이 최우선적 과제임은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이름으로 사사로움이나 불순함이 개재되는 일은 오랜 걱정거리였다. 사회학자 칼 만하임이 지적한 대로 원자화되고, 불안정하고, 무기력하게 흩어져 있는 대중은 소수의 엘리트나 파시즘, 공산주의 같은 권위주의에 의해 조작, 오도되는 위험에 노출돼 있다면 대중 스스로에게도 독약이 아닐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는 금과옥조이다.  광화문과 시청 앞에 운집하는 격정적이고 유동적인 대중의 중심을 이성과 합리성으로 순화된 건실한 공중이 지탱해 줄 수는 없을까? 나와 대중의 경계에서 대중사회의 어렵고 예민한 테마, 그 좌표와 미래를 부둥켜안고 고뇌에 빠지곤 했다. 송장길 / 언론인·수필가열린광장 대중 경계 입고 대중문화 대중 스스로 파시즘 공산주의

2023-10-03

[잠망경] 정신병동의 파시즘

한 주에 한 번씩 병동환자들을 아래층 몰(mall)로 내려보낸다. 그들을 몇 명씩 다른 방에 나누어서 직원들이 그룹테러피를 하기 위해서다. 그럴 때마다 내려가지 않겠다는 환자들이 몇몇 있다. 단체 생활을 싫어하는 마음가짐. 그중 반항기 많은 젊은이가 책임 간호사에게 “This is fascism!”이라고 소리친다. - 이건 파시즘이야!   어릴 적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농담 비슷하게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이건 ‘파쇼’에요!” 파쇼? 맞다, ‘fascio’! 이탈리아어로 ‘한 뭉치’라는 뜻. 1919년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창시한 정치적 결속단체 이름이었다.   파쇼는 전체주의 또는 독재주의라는 의미로도 폭넓게 쓰이는 말. 주로 상대방을 농담 혹은 진심으로 비방할 때 사용된다. ‘그런 법’은 없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화법으로 보면 대체로 상식에 어긋나는 불법적인 여건을 지적할 때 좋은 표현이다. 한 정당이 말도 안 되는 수법으로 상대 정당에게 억지를 부리며 떼를 쓰는 장면이 떠오른다.   떼를 쓴다고 할 때의 ‘떼’를 사전은 ‘목적이나 행동을 같이하는 무리’라 풀이한다. 떼거리, 생(生)떼 하는 바로 그 ‘떼’. 영어의 ‘group’. 한 개인이 그룹이나 단체처럼 강력하게 떼를 쓴다는 어법이 흥미롭다. 암, 개인보다 단체의 힘이 강하고말고. 그래서 당신은 협회에 가입하거나 당원(黨員)이 되지 않았던가. 한 개인의 미약한 면목보다 소위 ‘fascio, 파쇼, 한 뭉치’로 뭉치는 힘이 언필칭 더 강하지 않은가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적인 동물이다”라 지적했다 - “Man is by nature social animal.” 당신과 나는 조석으로 페이스북을 열어 보고, 연말연시에 ‘Social Networking System (SNS)’를 분주하게 드나드는 삶을 영위한다.   ‘social’은 14세기 불어와 라틴어에서 가정생활(home life)을 한다는 의미, 배우자와 같이 산다는 뜻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독신자는 사회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social’은 워낙 전인도유럽어로 누구를 따른다는(follow) 의미였다. 타인과 공존하는 일상을 위하여 상대의 의향을 따르는 우리가 아니던가.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전체주의를 분별해서 생각한다. 우리는 개인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시대를 사는 만큼 전체주의는 21세기에 발을 들여놓기가 힘이 든다. 그건 완전 파시즘! 파쇼다. 무분별한 단체주의 대신에 분별력 있는 개인 취향이 앞서가는 세상이다.   ‘individual’이 하나의 사물 또는 물건이라는 뜻에서 개인(個人)이라는 의미로 변한 시기는 1640년경. 그 이전 서구인들에게는 ‘개인’이라는 말, 하물며 ‘개인주의’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는 추론이 성립된다. 그들은 군주 또는 기독교적 교리를 따르며 추종했고 개인적인 성향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individual’은 ‘분리할 수 없는’이라는 뜻.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原子)에 해당하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이렇게 설파한다. - 사회는 개인을 앞장서는 그 어떤 것이다.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거나 자급자족하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어서 사회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짐승이거나 신(神)이다. - 그래서 나는 2022년 끝자락에서 당신에게 소리친다. Happy Holidays to You!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정신병동 파시즘 완전 파시즘 social networking 정치적 결속단체

202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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