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크 게이블이 세상을 홀린 ‘로맨틱 코미디’ 원조
2024년은 컬럼비아 픽처스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컬럼비아는 스튜디오 창립 10주년이 되는 1934년, ‘어느 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ed One Night)’로 제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등 주요 5개 부문(그랜드슬램)을 석권한다. 이후 90년 동안 그랜드슬램을 기록한 영화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62)와 ‘양들의 침묵’(1991) 두 편뿐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마틴 스코세이지, 스티븐 스필버그 등 거장들이 존경을 표해온 이탈리아 출신 감독 프랭크 카프라가 연출한 ‘어느 날 밤 …’은 영화사에서 남녀 주인공이 톡톡 쏘는 대화로 갈등을 겪다가 깨질 듯한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이른바 ‘로맨틱 코미디’의 효시로 기록된다. 시대를 초월한 낭만적 로드 무비, 여행지에서 만난 두 남녀 사이의 로맨스로 오늘날까지 영원한 명화로 기억되는 ‘어느 날 밤 …’은 백화점 점원, 농부, 단역 배우로 전전하던 클라크 게이블이 ‘할리우드의 제왕’으로 등극하는 발판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는 5년 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엔터테인먼트계의 불멸의 스타, 가장 위대한 남성 스타로 떠오른다. 플로리다에 사는 은행가이며 대부호의 상속녀 엘리(클로데트 콜베르)가 바람둥이 남자친구 킹 웨슬리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뉴욕행 버스에 오른다. 그녀는 버스에서 근무 중 술을 마시다 해고된 신문기자 피터(클라크 게이블)와 나란히 앉게 된다. 지갑을 잃어버리고도 신고하지 않는 엘리를 보며 피터는 기자의 본능적 호기심을 발동한다.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된 피터에게 엘리는 뉴욕에 도착하도록 도와주면 특종 기삿거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피터는 부잣집 딸의 스토리에 관심이 없다면서 엘렌의 제안을 거절한다. 폭우로 다리가 끊겨 엘리와 피터는 캠프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버스 기사가 승객들의 노래에 흥겨워하다 차를 도랑에 처박는 사고가 발생한다. 히치하이킹에 성공하지만 하필이면 그가 노상강도다. 이처럼 연달아 일어나는 우연찮은 사고로 인하여 두 사람은 터벅터벅 함께 걷고 밤하늘의 별을 보고 이슬을 맞으며 함께 잠을 청한다. 피터와 엘리는 호텔비를 절약하기 위해 부부로 가장하여 한 방에 투숙한다. 피터는 두 침대 사이에 줄을 매고 담요로 커튼을 치면서 엘리를 안심시킨다. 피터는 퉁명스럽고 거칠게 행동하지만 흑심을 품지 않는다. 엘리는 대부호의 딸답지 않게 고분고분하며 늘 피터에게 제압당한다. 원나이트스탠드가 간단히 이루어지는 요즘의 시대상과 달리 두 사람은 끝까지 숙녀와 신사의 품격을 지킨다. 엘리는 다음번 도착지 모텔에서 피터에게 다가간다. 헤어질 순간이 다가오자 그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사랑을 고백한다. 피터는 엘리를 잠시 안아주지만 곧 단호하게 그녀의 침대로 돌아가라 말한다. 젠틀맨다운 피터의 진면목에 엘리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든다. 이튿날 새벽녘 잠든 엘리와 아픈 마음을 뒤로한 채 조용히 모텔방을 빠져나가는 피터. 3박 4일의 여정 끝에 집으로 돌아온 엘리는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식장에 들어선다. 신랑 웨슬리가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딸에게 속삭인다. “웨슬리를 사랑하지 않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평생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고 다시 생각해봐라.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내가 피터를 만나봤는데 좋은 녀석이더라. 널 사랑하더구나.” 엘리는 식장을 뛰쳐나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대기시켜둔 차를 타고 저 멀리 사라진다. ‘어느 날 밤 …’은 결혼식장에서 도망쳐 나오는 신부를 다룬 최초의 영화다. 하객들의 경악 속에 신부가 결혼식장을 탈출하는 장면은 이후 많은 영화들에서 재연되는데 ‘졸업’(1967)과 ‘런어웨이 브라이드’(1999)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90년이 지난 오늘까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영화는 당시 미국 사회에 상당한 파급력을 가져왔다. ‘어느 날 밤 …’은 여배우가 자신의 각선미를 보여주며 지나가는 차를 세우는 히치하이킹 장면을 사용한 최초의 영화였다. 콜베르는 처음엔 숙녀답지 않다는 이유로 다리 노출을 거부했다. 카프라 감독은 하는 수 없이 대역을 사용했다. 촬영을 지켜보던 콜베르가 “저건 내 다리가 아니잖아!”라고 화를 내며 촬영에 응했다. 콜베르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최악의 영화’라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로맨틱 코미디, 히치하이킹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후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그녀의 히치하이킹 장면을 패러디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또한 패션 트렌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클라크 게이블이 모텔에서 옷을 벗는 중에 셔츠 안에 내의를 입고 있지 않은 ‘파격적’ 장면은 여성들에게는 섹스 어필로, 그리고 남성들에게는 내의를 입지 않는 유행으로 이어졌다. 게이블이 도넛을 커피나 우유에 담가 먹는(Dunk-in) 장면에서 도넛 체인점 ‘던킨 도너츠’의 이름이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루니 툰’ 시리즈에서 당근을 먹는 토끼 버니도 이 영화에서 게이블이 당근을 먹는 장면을 패러디한 것인데 그 덕에 무슨 야채든 다 잘 먹는 토끼가 당근을 주로 먹는 동물이라는 근거 없는 오해를 낳았다. 두 연인이 버스에서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 내용은 버스 여행이 시대의 낭만과 풍조로 인식되며 시외버스 여행 붐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당시 청춘남녀들은 버스 안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로맨스를 기대하며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만들어 냈다. ‘어느 날 밤 …’의 대성공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콜베르의 데뷔작이 하필이면 폭망했던 카프라 감독의 영화였기 때문에 그녀는 처음에 출연 제의에 응하지 않았다. 촬영장에서도 콜베르와 카프라의 충돌이 잦았다. 피터 역은 원래 로버트 몽고메리가 맡기로 했었지만 그가 대본을 읽고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거절하자 콜롬비아는 MGM 소속의 게이블을 대타로 빌려와야 했다. 게이블은 당시만 해도 마이너 영화사였던 콜롬비아를 메이저로 부각시키며 영화 산업의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주역으로 활약하며 할리우드 신화의 주인공 자리에 올랐다. 김정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코미디 로맨틱 클라크 게이블 로맨틱 코미디 신문기자 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