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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안톤 체호프의 소설, 대초원 - II

소설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거기에는 영웅도 악당도 없다. 자기중심적인 삼촌, 착하고 어리석은 신부, 아이들을 끔찍이 아끼는 유대계 엄마, 아름다운 백작 부인, 부랑자, 마부 등이 조금도 미화되거나 덧붙여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치 타페스트리에 수를 놓듯 자신만의 자리에서 당당하게 존재하고 있다. 별 볼 일 없는 보통사람들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사람들의 일상을 주로 그린 체호프의 글은 당대의 대문호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처럼 종교나 죽음, 인간 존재에 대한 심오한 철학을 다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이 와 닿는 그 무엇이 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이 낳은 극작가이자 단편소설의 거장인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그가 처음으로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예술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중편소설 ‘대초원’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기대를 모으는 신인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푸시킨문학상을 받는다.   작가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체호프, 그의 소설은 주인공도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체호프의 어휘는 간결하고 제한적이다. 초기의 단편인 ‘관리의 죽음’에서 갑자기 죽어버리는 주인공, 죽음을 앞두고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는 ‘주교’ 등에서 보면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문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마치 우리네 삶처럼 말이다.   후세에 자유로운 예술가로 기억되기를 희망했던 그는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나를 자유주의자니 보수주의자니 무신론자니 하면서 확고하게 어떤 틀 속에 가두어 넣고 규정지으려는 사람들이다. 나는 단지 자유로운 예술가이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고향인 아조프 해에 면한 항구도시 타간로그에 잠시 돌아가 순수하고 자유로웠던 유년을 그리며 썼다고 전해지는 소설 ‘대초원’은 작가 자신의 자서전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자연을 향한 신비와 감사는 반복되는 주제로서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대초원’인 것이다. 밝은 노란색 카펫처럼 끝없이 펼쳐진 밀밭, 먼 거리에서 작은 남자가 팔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돌아가는 풍차, 수평선과 맞닿아 있는 진홍색 빛 하늘이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연민과 우수가 가득 찬, 지극히 인간적인 그의 글을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춘희 / 시인삶의 뜨락에서 체호프 대초원 소설 대초원 안톤 체호프 극작가이자 단편소설

2023-05-22

[삶의 뜨락에서] 안톤 체호프의 소설, 대 초원 - I

1888년에 발표된 체호프의 중편소설 ‘대초원(Steppe)’은 남부 러시아의 광활하고 황량한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여정을 9세 된 어린 소년의 눈으로 보고 느낀 순수한 여행기이다. 일련의 작고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이야기는 소년과 저자의 두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뜨거운 7월의 어느 날, 키예프에 있는 큰 학교에 입학하려는 예고 루슈카는 그의 삼촌과 은퇴한 신부와 함께 시장에 가지고 갈 양모를 마차에 가득 싣고 마부와 함께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년은 길을 떠나면서 단조롭고 무료한 우크라이나의 광야 한가운데 ‘위시 위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풍차, 곡식의 낱알을 고르고 있는 헤론(heron)처럼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진 젊은 처녀의 강인한 모습, 구름이 한가득 몰려왔다 곧 흐트러지곤 하는 수시로 변하는 하늘, 캄캄한 벌판, 별 아래 목재가 가득 쌓여있는 수레 등을 지나치면서 막막하게 펼쳐져 있는 대초원에 신비스러움을 느낀다.   “숲도, 높은 언덕도 없는 대 벌판에서 있는 포플러나무, 그는 무더운 여름, 겨울에는 서리와 눈보라,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무의미한 바람의 울부짖음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가을의 끔찍한 밤, 그리고 가장 최악의 경우 평생 혼자이다. 그 사랑스러운 생물은 행복했을까? 신만이 그 이유를 알 것이다.” 소년은 외로운 포플러를 식별했다. 나도 생각에 잠긴다. 텅 빈 벌판이 내다보이고 묘한 슬픔에 젖어 든다.   대초원의 신비스러움 이외에 특히 인상 깊게 다가왔던 부분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덜커덩덜커덩 삐거덕삐거덕’ 거리는 낡은 마차, 그 뒤꽁무니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넝마 같은 가죽끈에 대한 이야기였다. 체호프는 그 가죽끈을 “애처로운 가죽끈!”이라 불렀다. 수백만년이 흐른다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그 가죽끈을 눈여겨본, 무섭도록 예리한 그의 관찰력, 무엇보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 특히 사랑받지 못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애처로운 것에 우리의 동정을 구하고 있다. 그는 연금술사처럼 진부한 것을 변형시킬 수 있다고 문학비평가들은 말한다.   러시아 문학강의에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그는 큰 문제를 다루지 않았으나 그의 산문은 플로베르처럼 시적이고 조이스의 작품만큼 심오한 통찰력을 갖고 있다. 그의 소설은 유머러스한 사람을 위한 슬픈 이야기들이다. 유머와 센스가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창 젊은 나이가 아닌 중년을 훨씬 넘긴 이 나이에 그를 더 가까이 알게 된 것은 내 삶에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춘희 / 시인삶의 뜨락에서 체호프 안톤 안톤 체호프 러시아 문학강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2023-05-15

[문장으로 읽는 책] 데미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 아닐까. 사춘기의 필독서, 성장담의 원형 ‘데미안’이다. 너무나 유명한 소설과 문장이라 새롭게 소개하는 것이 멋쩍을 정도지만 ‘집콕’ 중인 요즘 어린 시절 ‘고전’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예전과 달라진, 또는 여전한, 혹은 더해진 감흥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난 그것을 살아보려 했을 뿐이다. 그게 왜 그리 힘들었을까?” ‘데미안’의 첫 문장이다. ‘데미안’은 글로벌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이 ‘피 땀 눈물’ 뮤직비디오 등에 그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아미들 사이에 필독 붐이 일기도 했다.   1959년 국내 최초로 세계문학전집을 펴냈던 을유문화사가 2008년부터 새로 선보이는 세계문학전집 100권 출간을 기념해 리커버 한정판 5종을 내놨다. ‘데미안’을 필두로 ‘체호프 희곡선’‘개인적인 체험’(오에 겐자부로) 등이 포함됐다. 리커버 에디션은 출판물도 굿즈로 소장하고 싶어하는 젊은 독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목록의 다양성과 번역·해설의 전문성으로 호평받는 을유세계문학전집은 앞으로 희곡·시·장르문학 등으로 외연을 넓힐 계획이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데미안 글로벌 아이 필독서 성장담 체호프 희곡선

202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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