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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칼럼] <2265> 오른쪽 어깨, 오른쪽으로 처지지 않아야

만약 자신의 스윙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논리적으로 이를 정리한 다음, 행동에서는 느낌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느낌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스윙을 간파할 때 발전을 거듭하지만 ‘나는 나’라는 고정관념의 틀 속에 자신을 묶어 둔다면 발전의 기대는 어렵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설픈 그립이나 스윙일지라도 자신에게는 편하고 감각만 확실하면 그것은 최상의 그립과 스윙이다.   문제는 평균치 즉, 비슷한 나이와 체격조건이 같지만 상대보다 형편없이 비거리가 떨어진다면 근본적인 스윙분석이 필요하다.   골프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 소위 주눅이 든다는 신체적 열세와 ‘저 사람은 독종’이라는 표현에 밀려나는 정신적 열세를 들 수 있다.   투어프로들 중 단신들의 경우도 체격적인 열세를 정신력으로 바꾼 모범적인 선수들이 많다. 이들의 대다수는 한결 같이 체력의 열세에서 분산되는 스윙의 힘을 한곳으로 모아주는 집결 력을 같고 있다.   이것은 다름아닌 임팩트 순간을 의미한다. 임팩트란 온몸의 힘을 어떻게 클럽헤드에 모아 볼에 전달시키느냐가 관건이다. 그것은 곧 구심력의 임팩트냐 아니면 원심력의 힘인가이다.   일반적으로 볼을 치는 순간에 힘을 분산시키는 첫 번째 원인은 왼쪽 팔꿈치가 벌어지거나 몸 뒤쪽으로 끌어당기는 이른바 양팔이 원형상태로 임팩트를 맞을(구심력) 때, 비거리와 방향성에 문제가 발생한다.   임팩트 시 머리를 들지 말라. 이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으로 이것에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중심 축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과 우측에서 좌측으로 넘겨지는 체중을 순간적으로 포착, 강력한 임팩트를 만들기 위함이다.   임팩트 순간 볼 뒤에 머리를 남겨둔(behind the ball) 상태에서 팔로스루(follow through)를 마쳐야 한다는 뜻이다.     대다수 골퍼들의 실수는 다운스윙 도중 힘이 분산, 정작 필요한 임팩트에는 밀거나 밖으로 향하던 클럽헤드를 몸 쪽으로 당겨, 볼에 파워를 전달시키지 못하는 경우다.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 스윙이란 백 스윙으로 올라간 길(궤도)보다 다운스윙은 몸의 안쪽에서 내려지며 올라간 같던 길로 다시 내리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함께 탄력을 받은 다운스윙의 상태에서 오른쪽 팔꿈치를 배꼽 쪽으로 살짝 밀어 넣는 기분만 있으면, 좌측으로의 체중이동도 쉽고 양손의 돌림도 쉬워 인사이드 아웃의 스윙을 창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다운스윙 과정에서 임팩트 순간까지 오른쪽 어깨가 오른쪽으론 처지지 않도록 다운스윙을 유도해야 한다.   ▶ThePar.com에서 본 칼럼과 동영상, 박윤숙과 동아리 골프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박윤숙 / Stanton University 학장골프칼럼 어깨 처지 다운스윙 과정 다운스윙 도중 임팩트 순간

2023-11-02

[아름다운 우리말] 벗아!

요즘 저는 월요일마다 옛글 읽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 관련 내용인 월인석보도 읽고, 중국어 학습서인 박통사도 읽고, 최초의 한글 성경(1887년) 중에서 마태복음도 읽고 있습니다. 시대와 종교를 넘어 공부하기에 기쁨이 큽니다. 특히 책에서 모르는 말이 나오거나 독특한 표현이나 쓰임이 나오는 경우에는 기쁨이 배가 됩니다. 공부가 점점 재미있는 이유일 겁니다. 모르는 기쁨이 호기심을 통해 아는 기쁨으로 바뀝니다.   최근에 최초의 한글 성경의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 예수께서 자신을 판 유다를 부르는 장면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를 잡아갈 사람에게 그가 예수임을 알리기 위해서 입맞춤을 한 유다를 예수는 ‘벗’이라고 부릅니다. ‘벗아!’(마태복음 제26장) 하고 말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를 벗이라고 부르는 장면은 이 장면이 유일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른 복음에는 혹시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경학자는 이 장면에서 유다를 벗이라고 부르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도 알고 싶어집니다. 공부하다 보면 궁금한 것 천지입니다.   벗이라는 말은 친구라는 말과는 달리 더 정이 갑니다. 아무에게나 벗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요즘 자주 쓰는 친구라는 말은 이미 타락을 해서 ‘이 친구, 저 친구’라는 말은 때로 친구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친구라는 말을 하대하는 장면에서 사용하니, 친구가 진짜로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벗이라는 말은 쓰임 자체가 드물어졌습니다. 내 벗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벗이여!’하고 부르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허나 벗은 여전히 가슴 찡한 따뜻함입니다.   저는 요즘 아침에 연구실에 오면 제일 먼저 사전을 봅니다. 정확히는 두 권의 사전을 봅니다. 1942년에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어사전(문세영)’의 수정 증보판과 1975년에 나온 ‘새 우리말 큰 사전(신기철, 신용철)’에서 동일한 항목을 찾아봅니다. 시대의 변화를 언어에서 몸소, 오롯이 느끼는 기분 좋은 과정입니다. 아침마다 말의 기쁜 세례를 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최근에 찾았던 ‘보람, 곱다, 사랑, 화’라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시대의 간격만큼 사고의 틈도 벌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이 두 사전에서 벗이라는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조선어사전에서는 두 번째 항목에 ‘숯불을 피울 때에 불씨에서 불이 옮기어 닿는 숯’이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설명을 보면서 벗은 가까이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같은 사회적 처지’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엄연히 다른 처지임에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가족같이 생각한다는 말이나 친구처럼 대한다는 말은 모두 가족과 친구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 친구’라고 하는 말이 기분 나빴을 겁니다.     벗을 한자로 하면 붕(朋)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붕우유신(朋友有信)에 나오는 말이지요. 붕은 같은 몸이 두 개 있는 모습의 글자입니다. 내가 또 하나 있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위안이 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이해해 줄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에서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했을 겁니다. ‘벗이 있어 멀리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해석입니다. 이 말에서 가장 핵심은 ‘벗이 있다’는 겁니다. 벗이 없다면 이런 표현은 성립이 안 됩니다. 비슷한 처지에 가깝게 지내던 벗이 멀리서부터 나를 만나러 찾아와 주었다면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즐거움은 기쁨과 달리 함께하여야 더 커지는 감정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자신을 판 유다를 벗이라고 불렀을까요? 그 말을 들은 유다는 어떤 감정이었을까요? 벗이라는 말의 무게를 생각해 봅니다. 마태복음에서 유다는 곧 후회하고, 판 돈을 모두 던져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비참한 결말입니다. 저는 종종 유다에게 감정이입이 됩니다. 예수께 벗이라는 말을 들은 유다의 후회입니다. 벗은 참 좋은 말입니다. 제 글을 기쁘게 읽는 글 벗이 보고 싶네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글 성경 사회적 처지 신기철 신용철

202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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